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8월 3일
해바라기 축제가 있다는 소식이 운명처럼 내게 전해졌다.
여름만 되면 해변으로 가는 사람들 덕에 대전에서 제천간 운행하는 열차가 아주 고맙게도 강릉까지 연장운행하는 기간이이었고 그 중간에 스물 다섯 시절을 보낸 태백을 경유해 간다는 것이다.
산은 강원도 산이 제일 인간적이다. 가슴을 열어 인간들에게 젖을 물리는 저 산 저 중턱의 어미같은 넉넉함 때문이리라!
승강장에 내려서 자꾸만 뒤돌아 보게 되는것은 내 젊은 시절 근무했던 사무실이 저 전봇대 어디쯤
있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쉬움 때문이고 지난번 태백 여행때 가장 가심아팠던 부분이다.
이담에 내가 대통령되면 강원지사나 태백시장이 알아서 복원해 놓겠지...자위하면서 통과!
태백역 전경
우리 온다고 기별한 일이 없는데 깨끗한 유리창 자꾸만 닦는 아주머니 성의가 참 고마웠다.
태백역전
스모르복(위아래 전부 까만 옷)입은 시커먼 광부들이 이맛박에 헤드렌턴 달고 몰려다니던 길이고
광장인데 이만하면 상전벽해 말고 달리 무어라 이를것인가?
오늘 만큼은 편하게 움직이리라 하고 택시타고 예까지 왔다.
십여분 남짓, 택시안에서 이번 보궐선거의 결과를 놓고 강원도민의 높은 정치의식에 대해 일백 오십만 충북 도민을 대표해서 경의를 표했고 기사님은 강원도민을 대표해서 감사하다 화답했다.
또한 해바라기 축제가 개인이 하는것이라서 입장료가 오천만원이라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고
난 괘념치않겠다 말했으며 가격은 이천만원이 적정하다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나 이리 고와도 열흘을 못가요 하면서 눈물 흘리는데
오랜 역사에 비하면 우리 사는것도 열흘이 채 안될터, 왜 꽃보다 고운 여자덜이 얼굴에 칼을 댈까?
자고이래로 마누라없이는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산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는 동네
입구에 작은 전시장 하나 있었는데 지면 관계상 이것 하나로 대체하고 통과!
시내 거주하는 봉알초등학교 친구 내외와 같이 왔다.
여기 저기 자랑할데가 한두군데인가? 급한 마음으로 한 컷!
입구에 잘 생긴 해바라기 꽃 한송이 대표로 인사하고
일백오십만 충북 도민을 대표해서 일백오십만 충북도민들이 즐겨마시는 시원소주로
강원도와 강원도에 핀 모든 해바라기꽃을 위하여!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람보다 아름답지 못한 꽃들과 어우러져 이와 같이 노니나니
꽃과 사람이 다같이 아름답더라!
구름이 머흔 꽃밭에 오가는 사람들
오이 안주삼아 댓바람부터 들이킨 시원소주덕에 꿈인지 생신지 사자성어로 비몽사몽....
일찌기 해바라기란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전쟁이 있었고 남녀간의 이별이 있었고 해바라기가 무진장 피어 있었다.
여긴 지금
해바라기만 무진장 피어있다.
전쟁도 없고 애처러운 여주인공도 없고 구름 머흔 중턱에 생각이 족한 사람들이
아해 손잡고 콧노래 부르며 내려오는 길 얼근한 취기에 쳐진 중늙은이 하나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은 맞다.
활짝핀 해바라기꽃보다 이 아해들의 저 초롱한 눈빛이 더 아름다움으로 인함이다.
해바라기 축제를 마치고 찾아간 곳은 태백 한우 특판장이었다.
지금은 산에 계신 선친께서는 돈 버는 방법 보다는 돈을 아끼는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아들은 그 가르침을 착실하게 받들었다. 그 아들의 "행"은 의식주 모든 부문에 걸쳐 아주 꼼꼼하고 빈틈없이 이루어져오다 나이 오십에 이르러 "식"에 대해 다소 느슨해졌다.
요는 눈에 밟히는 자식새끼, 대단히 불경스러우나 팔순 노모 마저 모질게 외면하고 요런때 나마 안해 옆에 앉혀놓고 이 비싸고 맛있는 쇠고기 허릿끈 클러놓고 배불리 먹어보자 이런 생각한지가 꼭 석삼년째라는 말씀이다. 일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나들이이고 보니 오늘이 세번째일것이고.
강원도 소주 한병 시켜놓고 페트병에 일백오십만 충북도민이 즐겨마시는 시원소주 따라 마셨다.
맨정신으로 먹기에는 돈 아까워 못먹을것 같아 강원도 소주로 취기를 올려놓고 실컷 먹고 또 한번 매장에서 가져다 배불리 먹었다.
성현 말씀에 의식이 족해야 예를 안다했던가?
"의"야 여름이니 넘쳐 나 걱정이고 "식"도 배불리 먹었으니 "예"를 모른다 할수 없지않겠는가?
잠시 놓았던 부모자식 생각에 사골에 꼬리뼈 얹고 우릴 때 같이 넣을 고기까지 큰 맘먹고 넉넉하게
샀다.
스티로폼 포장까지 해 줘서 올 때 찾아가기로 하고 철암가는 길을 물었다.
충북에 어디 쇠고기 없어 예까지 먹으러 왔으며
충북에 어디 해바라기가 없어 예까지 꽃구경왔겠는가?
"지금 마이 변해서 못 알아 볼낍니다."
요 윗그림 빨간 티셔츠 입으신 한우 판매장 사장은 기대에 찬 나를 바라보며 다소 걱정스런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 스무살 시절 던져지듯 찾아든 철암이 여기 있었다.
역사는 오십여미터 밑으로 내려와 새로 지어져 있었고
바람불적 마다 석탄가루 까맣게 일던 역 구내
지금은 석탄 찌꺼기만 남아있고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 이후 단 한삽의 석탄도 캐지 않는다했다.
저 찌거기만 시멘트 공장으로 들어간다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보다 양이 엄청나게 줄었다.
스무살 젊은이가 이렇게 삭아지다니 세월이 참 원망스럽다.
역사를 빠져나와 옛 역사로 가는 길
담벼락에 낙서처럼 씌여져 있는 글은 나으 일기이자 증언이기도 하다.
석탄물 까맣게 흐르던 내 이름이나 이쁘게 짓자고 도화강이라 불렀었다.
옛 역사터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역전파출소는 사라져버렸다.
자췻방으로 가는 길은 이 시장통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었다.
제법 복작대는 이 길은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 부딪히기 일쑤였고 좌우 늘어선 선술집은 늘 나를 붙잡곤 했다. 스무살 시절 나는 막걸리만 마시고 살았던것 같다.
찾다 찾다 못찾아 저 할메한테 물었다.
대략 삼십여년전 이 부근에 유도 도장하던 집이 어디냐 여쭙자 저 모래더미 앞 벽돌집 터라 했다.
그랬다.
주인은 광부였고 털보였고 웃을땐 광부답지 않게 순진해 보이던 아저씨는 도장이 딸린 집에서 틈나는대로 아이들에게 유도를 가르치는 관장이기도 했다.
우즈베키스탄 여자처럼 눈이 크고 예쁜 아주머니와 엄마닮아 예쁘던 난영이, 인영이 두 딸이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어찌 그 두 딸 이름이 느닷없이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이날까?
노가리 안주삼아 700원짜리 고량주 홀짝 대던 삼십삼년전의 내 자췻방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한참을 그자리에 서서 옛생각에 잠기는데 문득 남겨놓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고 되돌아가기로 했다.
이쯤이다 "일호집"이란 상호의 밥집이 있었다.
요는 낮엔 밥집이고 해가 넘어가면 술집으로 변하는 요술궁전
낮에 밥상 날라주던 아가씨들도 해가 넘어가면 잠자리 날개같은 속옷 내 보이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젓가락 두드려 가며 같이 술마셨다.
여기까지이다.
세월은 모든것을 바꾸어 버렸다.
그때 그 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갔고 되돌아 온 사람 하나도 삼십년 에누리 없이 늙었으며
이제 그도 언제 다시 온다는 기약없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왔던길 고대로 가는 길
우리를 태워왔던 열차는 강릉까지 갔다가 제시간에 데릴러 왔다.
열차간에서 일백오십만 충북도민 두 내외는 남아있던 일백오십만 충북 도민이 즐겨마시는 시원소주를 마시면서 일찌기 강원도에서 살았던 젊은 충북 도민의 강원도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머지 충북도민들은 이를 경청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은 밤 늦게 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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