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한 날(2)|
세상에 감기몸살치고 점잖은 감기몸살이 어디있겠나만 구랍 아기예수님 생신 앞세우고 내게 찾아온 감기몸살은 그 점잖지 못하기가 팥쥐 모친 못지않게 드센지라 해를 넘겨가며 그것 떼어내는데 여간 고생을 한게 아니었다.
가까스로 추스르고 일어날 만하니 무슨 바통 넘겨주며 이어달리기 시합하듯 안해가 이맛박에 손을 얹더니 서랍 뒤져가면서 내 먹다 남은 약을 찾아내어 먹어가면서 꼭 내 그러했을 때처럼 “에고 나 죽겠네! 다 소용없다. 내가 살고 봐야지!”
동지섣달 긴긴밤을 날숨에 장단에다가 가락까지 버무려 흥얼거리니 저 회심곡 완창으로 유명한 김영임 여사가 “싸부님!” 하고 꿇어앉을 정도로 애절하게 가슴을 파고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따금씩 기침을 할 적마다 가슴패기를 도끼로 찍는 것처럼 아프다면서 역류성식도염이 재발되었다 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서 들었다며 플라자 맞은편 무슨 병원에서 주사를 맞으면 한방에 똑떨어진다하면서 거기를 가야겠다는 것이다.
병원 가는 차안에서도 안해는 생각하기를 처방전 받아 약을 지어 먹고 엉덩이 까 내리고 한 방에 똑떨어지는 주사 똑 떨어지게 맞고나면 이 고생은 끝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나 진료실 나서면서 간호사가 주사실을 가리키며 들어가 침대위에 누우라 하니 금새 얼굴색이 바뀌면서 무슨 주사 길래 누워서 맞느냐는 질문에 간호사는 대수롭지 않게 링거니까 족히 두어 시간은 걸릴것이라 하니 금새 또 낙심하며 나를 불러 세워놓고 금방이라도 세상하직하며 남기고 싶은 이야기 하듯 렌치에 사골국물 얹어 놓은 것 불을 줄여 놓을 것과 해지기 전에 베란다 화초를 거실로 옮겨 놓을 것, 빨래는 걷어 개어 놓을 것 등등을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이르는 것이었다.
다저문 시간이 되어 아해가 모셔서 집으로 돌아온 안해는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일찍 잠자리에 들더니 이내 죽은 듯 하룻밤을 자고 났으나 그 기침할 때 가슴 아픔은 여전하다면서 어디서 또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신장병 치료를 담당하는 시내 엄박사네 병원에 다녀와야겠다는 것이다. 일전에 당한 것도 있고하여 이번에는 사이좋게 엘리베이터타고 병원까지 같이 들어갔다. 한참을 지나 가운으로 갈아입은 안해의 모습이 잠깐 보이더니 이내 촬영실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늘 검은 옷을 즐겨 입는 안해의 모습만 보아왔던 터라 분홍색 가운을 입은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요 며칠 잘 먹지 못한 탓에 창백해진 얼굴이 그 정도를 더하는 듯하였다.
내심 탄식하며
“저리도 고운 안해여! 아프다 소리만 아니하면 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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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지나 처방전을 받아들고 나오면서 내게 이르기를 그 “가슴 아픔”은 폐에 물이 찬 연유이며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일주일 정도 입원하여 치료를 해야 하나 우선 이뇨제를 복용하여 체내 과다한 수분을 제거한 다음 내일 경과를 보아 그때 결정을 하겠다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로윈이 이르기를 “하수는 쉬운 일을 어렵게 하며 고수는 어려운 일을 쉽게 하는 법”이라는 말이 생각나 무심코 말이라고 하기를 “폐에 물이 찼으면 소주병에 소주 따라내듯 바람벽에 세숫대야 앞에 놓고 물구나무 서기하면 콧구멍으로 흘러내려 대야에 고이지 않겠나?” 했더니 안해는 눈을 부라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간호사 두 명이 소리 없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점심으로 누룽지 끓여 먹은 안해는 그 이뇨제를 복용하고 저녁때 까지 무려 스물다섯 번 화장실을 들락거렸으며 밤새도록 무시로 그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난 서른 다섯 해째 계속해온 일을 하러 일터로 향했고 안해는 큰 아해를 앞세워 엄박사네 병원으로 향했다.
매일같이 해도 되고 하지 아니하여도 되는 일을 하는 척 하느라 정신 사납기가 그지없는데 가슴에 진동이 전해져와 휴대폰을 열으니 안해의 목소리가 구내방송 스피커에서 나오듯 귓구멍이 얼얼하게 들려온다.
“가슴 아픈 것 다 나았다네! 입원 안해도 된다하네! 그리고 알부민 수치도 훌쩍 올라갔다네! 야이 내 서방님아! 내 다시 살아났으니 날 무시했다간 가만 안둘줄 알어!! 알었찌?!”
참으로 다행이다. 당분간 한 시름 놓아도 되겠구나!
가슴속에 잔뜩 도사리고 있던 근심걱정이 늦은 봄 눈 녹듯이 녹아내리는가 하였더니 그 빈 가슴에 금새 넘치도록 채워지는 것이 “쉰넷, 내 삶 하루 한나절이 새로운데 허구헌 날 마누라 걱정으로 늙어가야하나!”하는 허허로움인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오늘 하루도 참으로 고적한 날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