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에서 부르는 노래

남자의 일생(1)|

조강옹 2019. 12. 25. 09:25

아침이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안해가 켜 놓고 나간 티뷔를 본다.

 

이른 시간

서둘러 출근해서 단정한 차림으로 나라 안팎의 새소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전해주는  여자 아나운서를  쳐다보노라면  일찌기 중국의 시황제도 누려보지 못했던 호사를 내가 누리고 있다는 행복감에 젖는다.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얼마만큼 복되고 행복한가를 거듭 가슴깊이 새길 즈음

 

주방에서 조찬을 준비하던 안해가 병을 하나 들고 들어오면서 마개가 도무지 열리지 않으니 한번 열어보라며 내민다.

 

나는 이런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주어지는 사소한 과제에도  긴장한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대한민국의 남자를 대표하여 여자보다 우월하다는것을 스스로 입증해야할 의무가 있고, 모쪼록 이  과제를 아주 신속하고 완벽하게 처리함으로써  안해로 부터 무한 존경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을 즐기고 싶은 욕심 때문이기도하다.

 

 

자세를 바로하고 왼손으로 병을 잡고 오른손으로 마개를 잡은 다음 , 서서히 힘을 주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렸으나 마개는 열리지 않고 손이 먼저 미끄러진다.

 

마개에 묻은 물기 때문이라는것을 금새 깨닫고 의자에 걸쳐있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다음 심호흡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힘을 주어 서서히 비틀었다.

 

돌아간다! 돌아간다! 돌아간다.  요지부동이던 병마개가 돌아간다~~~~

 

해냈다!!....

 

 

짐짓 의연한 표정으로 분리된 병 마개를 도로 닫아 안해에게 건네는 순간 비로소 그 속에 담긴 내용물에 눈이 갔다.

 

꿀!

꿀이었다.

저 안동네 스님께옵서 벌통을 얻었는데 놓을데가 마땅치 않다는 말씀에 우리 선산 아래 백여평 작은 밭머리에 놓는것을 허락한 댓가로 얻었다는 얘기를 얼마전에 들었던 기억이 난것이다.

 

"거  누구 줄라그러시오?"

 

입고 당시 마개까지 꽉찼던 내용물이 거진 반이나 줄어있다는 생각에서 물었다.

 

"큰아이가 기침을 하고 몸이 허한것 같아서 메칠 멕여보는건디...."

 

 

.................

 

"아무리 그렇다 한들  가장인 내게 한잔 타주고 그리하는게 순서고 도리 아니겠오?"

 

 

 

"쯧!   한심한 양반아!

비같지 않은 시비이고 태클같지 않은 태클이로다 !

아비가 돼가지구 어디 아들 챙기는데 시비구 태클인가?"

 

퍽하니  들고 있던 꿀병으로 어깨를 한방 치고 유유히 주방으로 향한다.

 

.............

 

 

"아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아주 오래전

제수씨께옵서 노래방에서 서글프게 부르시어 가슴을 저미게 했던 이 노랫말의 말미는 남자의 일생으로 바꾸어져야한다.

 

중국의 시황제도 부럽지 않던 행복감이 유리창 깨지듯  일거에 허망하게 스러져 갔던  그날 아침

 

어깨에 찡하게 다가왔던 통증보다 가슴속 깊은곳에서 전해져 오는것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참아야 하는, 참을수밖에 없는 굴욕이고 설움 그 자체였던것이다.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