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한 달(8) - 논짓물에서 월라봉까지
오늘은 서쪽으로 가리라 작정하고 나온 아침 바닷가로 난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난간에까지 공을 많이 들인 다리 건너 너른 포장도로 따라 "뽄때"없이 바다로 가는 것인가? 하는 실망이 들 즈음 왼쪽으로 감추어 놓은 듯 길이 하나 나오고
이 길로 다시 돌아온다면 배낭 벗어 놓고 곤한 다리 한참을 쉬어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절로 발이 시려오는 곳을
지나면서 곳곳이 아늑한 쉼터에 아침 산책길로는 더할나위없는 좋은 길 따라 내려간다.
왕수천
바다까지 동행을 약속한 듯 흐르는 물 따라 가는데 고삐 풀린 망아지 쫒아가듯 물은 늘 저만치 앞서 흐른다.
바다는 탁 트였고 불어오는 바람 따라 한참을 걸었다.
잠시 쉬어가기로 이만한 곳이 있을까?
앙증맞은 자그마한 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련된 쉼터에 배낭을 풀었다.
오랜만에 뭍에 있는 그리운 사람과 장시간 통화를 하고 내친김에 양말까지 벗어 쉬면서 도시락까지 꺼내 먹었다.
서귀포 바다에서
김 병 호
멀리 있어 바다라 했다.
멀리 있기에 꿈이라 말했고
행복은 그저 그렇게 멀리 있다.
비 오지 않는 땅
눈 내리지 않고
먼지만 퀭한 황무지를 떠돌던
눈동자들
일어나
어느 날 돌고래를 만나라
섬 어딘가에 두고 온 전생 하나 잊지 못해
저기 파랑에 고개 들어 빠끔 눈 맞추는 돌고래처럼
다시 서귀포 땅 끝에 서면
파도가 검은 바위 따귀 때리는 소리에
철렁, 가슴 내려앉는 바다가 있다
내 얼굴에 짠물 튀며 말 걸어 여기 바다라 했다
알싸한 태고의 체온으로 악수할 수 있어 꿈이라 했고
목덜미 감싸 안는 짠내 있어
바로 여기에 있어 행복이라 했다
돌아온 것들 만나는 땅 서귀포
살아있어 바다라 했다
/ 시라는 것이 다분히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읽는 이 마다 다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터에
멀리서 다가오는 절벽이 궁금해졌다.
혹여, 돌고래가 눈 맞춘 풍경이 저 절벽은 아닐까?
길가에 편히앉아 나누는 저들이나 나나 이방인이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두고 온 땅이 너무 멀어 보는 눈이 애잔하다.
절벽은 더 이상 접근을 허용치 않고 인색하나마 옆으로 좁고 험한 길을 내 주었다.
개구멍처럼 난 길은 높은 곳으로 향했다.
가파른 오르막은 동굴처럼 이어지다 한두 번 내려다 보는 것을 허용하더니 이 높은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밭을 내주었다.
바람 한 줄기 없이 조용하고 아늑한 - 사람 사는 세상은 아닐것같은 생각이 절도 들었다.
무릉도원이 있기로 이만하기나 할까?
도둑고양이처럼 살그머니 한참을 걷고서야 멀리 사람 사는 세상이 보인다.
속세로 가는 이정표가 이리 반가울까?
낮은 곳으로 내려와 보니 억새를 밝히는 햇볕이 반가웠고
밭을 매는 할망의 모습도 정겹다.
농사일치고 쉬운 일이 어디있겠나만 그중에 밭 매는 일이 제일이라!
이 세상 남자로 태어나 여자를 존경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천하장사도 손사래쳐가며 마다하는 -
온종일 햇살이고 밭 매는 일을 저 할망은 묵묵히 참고 견디며 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길가에 단장한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