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한 달(최종회)- 천국으로 가는 계단 영실
두어 번 다녀간 길이고 산이기에 만만치 않다는 생각으로 발만 보고 오르다가
문득 뒤돌아 본 걸어온 길이 저랬고 앞으로 가야할 길 올려다 본 풍경이 저랬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란 영화도 있었고 소설도 있었다.
그만큼 계단 딛고 오르는 아름다운 길이 예말고 또 있다는 얘기겠지만 그곳이 어디에 있건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을거라했다.
넋을 놓은 사람은 비단 나뿐이 아닌듯했다.
작금 날씨가 고르지 못했고 어떤 날은 비가 온다하여 배낭을 매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대개가 병아리 오줌만큼 찔끔 내린 비로 하루를 공친데 대해 속상해했다.
모레면 이제 뭍으로 가야하는 날이었고 요행이 날씨가 좋았다.
늦은 삼월 두어 차례 반쯤 눈 녹은 이 길을 나는 좋아했다.
그때 그 길이 가을에 이런 모습으로 단장하고 나를 맞아주려고는 생각지 못했다.
멀리서 바라봤던 연녹색은 조릿대의 작품이었다.
홑이불처럼 지면을 덮은 조릿대는 아직 생기가 남아있는 녹색과 말라 죽은 연노랑이 조화되어 신비로운 빛을 띠었다.
왼쪽에 샛길로 빠져 오른 전망대
지금 사진을 들여다봐도 귀가 시릴 정도로 바람이 차고 셌다.
그래도 넋 놓고 바라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리목으로 뻗은 저 길
길도, 사람도 아름다웠다.
남벽분기점까지 다녀와서 저 길을 걸으리라.
휴게소는 공사 중이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약속이나 한듯이 배낭을 풀었다.
엄마 없이 소풍 온 아이처럼 구석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냈다.
예전에 사람들과 새우깡 나누어 먹던 까마귀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라산
남벽 분기점
백록담의 뒤통수 구경은 여기까지다.
뒤돌아 가던 길은 여기가 오던 길인가 싶게 편하고 아름다웠다.
윗세오름에서 어리목으로 가는 길
가보지 않았던 길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올라올 적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길을 꿈꾸듯 걷는다.
중간에 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 하나 마련되어있고 팔방미인처럼 언제 어디서고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눈을 돌리기가 아까울 정도로 보기 좋았다.
꿈속을 헤매듯 걸어 내려오는 길은 어느 지점에서 부턴가 올라올 적 영실쪽에서 오길 잘했다 싶을 정도로
지루한 돌계단의 곡한 내리막이었다.
그래도 이제껏 한나절 눈에 남은 잔상은 그 길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졌고 속세 같은 어리목에 도착해서 비로소 무릉도원
구경 끝내고 낮잠에서 깨어난 가난한 노인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허망하기보다는 이담에 우리 죽어 간다는 천국이 있다한들 오늘 내가 걷고 내가 본 세상보다 더할 수는 없겠다싶어 행복했다.
제주의 신령들이 모여 계신다는 영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산신령님께옵서 봉송 삼아 내게 주신 선물이라 여기고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버스정류장으로 향해 내 딛는 걸음걸음이 아쉽고 소중하기에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스러웠다.
안녕 제주!
나는 내일 뭍으로 간다, 가서는
바람 따라 파도가 하얗게 거품 물며
아무리 “때리고 부수고 무너뜨려도”
“임처럼 꿈쩍도 않던” 현무암처럼 까맣게 잊고 살다가
불현듯 아직도 거기 바람부는지
감자꽃 하얗게 핀 밭고랑 따라 김 매던 할망들
옷 걸린 밭둑에 혼자 서 있던 나무 더불어 그대로 강녕하신지
다 올라선 영실 오르막
고사목 되어 장승처럼 서 있던 구상나무
아직 거기 그대로 벗은 채로 서 있는지
“임처럼 꿈쩍도 않던” 현무암처럼 까맣게 잊고 살다가
월령삼거리 버스 세워 오르던 저지오름
묘지 돌담에 노랗게 피어나던 키 작은
그 꽃,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지
침대에 누운 채 손 뻗어 창문 열면
까만 하늘에 박혀있던
초롱한 별 몇 개, 아직도 그 하늘에 초롱한지
송악산 전망대 내려오면서 울컥 토해내듯
까닭모를 서글픔에 제주가 그리워오면
이른 새벽 미호천 하늘 위를 날던 새가 되어 날아 오면 되지
지난 한달 제주가 내어준 길
바람 따라 걸으면서 노상에서 행복했던 걸.
“임처럼 꿈쩍도 않던” 현무암처럼 까맣게 잊고 어찌 살겠냐고.
2021/10/25 색달 글로리 303호에서
부족한 글 여기까지 따라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모든 분들 건승하시길 기원드립니다.
12.28. 조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