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면서 부르는 노래

잃어버린것에 대하여-아내의 주민등록증과 가부장권

조강옹 2019. 12. 23. 18:58

아주 먼 곳으로부터 들려왔다.

멀리 헤엄쳐 가던 아이가 제어미가 부르는 소리에 허겁지겁 뭍으로 돌아오듯 곤한 육신 믿고 멀리 떠났던 혼에게 몸뚱이로 돌아오라 부르는 소리- 다급한 알람소리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그 '혼'이 있던 자리로 돌아오기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나는 피곤하였던 것이다.

 

불이 켜져있었다.

아내가 누워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티뷔하단의 디지털이 열한시 삼십육분의 육자를 막 찍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3의 큰아이를 데릴러 가야할 시간임을 알려주는 '문자메시지'이기도 했다.

차 키를 집어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시동을 걸어 후진으로 커다란 몸뚱이를 차고에서 끄집어내고 있을 때 옆집 마당에 택시 한 대가 와 섰다.

 

 '아내이리라....'

 택시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다음  차를 빼내어  1단으로 기어를 바꾸고 라이트를 켰을 때 생각대로 눈부셔 하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못본체 핸들을 돌려 출발했다.

 언뜻 무어라 말을 하려던 아내의 눈이 커지는 모습을 스쳐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꾸역꾸역 삼켰다.

 

 회식이 있다고 했었다.

아홉시가 넘어도 아내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어느 노래방에서 '장록수' 흐드러지게 부르며 진창 놀고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리다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 아내가 공교롭게도 큰아이 데릴러 가는 나와 마당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이 시대, 이 나이에 빛 바랜 가부장권 움켜쥐고 이러쿵저러쿵 시시콜콜하게 잔소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매일 하는 회식도 아니요 어쩌다 어울리다 보면 늦을 수도 있겠다 생각할 정도의 관대한 남편이 될 준비가 내게는 돼있다. 하지만 전화라도 한 통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전화는 고사하고 이제사 그것도 떡하니 택시 타고 돌아온 것이다.

'그냥은 못 넘어간다. 한바탕 크게 벌이리라 '

어금니와 더불어 액셀레이터 지긋이 눌러 밟으면서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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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 좁은 공간 숨소리만 들어도 아비의 기분을 짐작 할 정도로 부자간의 연은 섬세한가

큰아이 태워오면서 숨소리 크게 들릴 정도로 말 한마디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새로 지은 차고는 사방은 물론이고 지붕마저 얇은 철판으로 둘러싸다 보니 차 문닫는 소리가  꽤 크게 들린다.

 간혹 선심 쓰듯 아내가 아이를 데릴러 갔다 올 때 난 이 차 문닫는 소리에 잠이 깰 정도다.  차문을 부러 크게 들리도록 힘을 주어 닫았다.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대문을 닫고 현관에 들어섰다.

먼저 들어간 큰아이는 제방으로 들어갔고 이때쯤 꼭 일어나 아이에게 눈 도장 찍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여니 누워 잠자던 아내가 눈을 비비벼 일어난다.

아내는 아이에게로 가고 나는 옷을 벗고 누웠다.

조짐이 이상했다.  죄은 지가 있으면 초조한 표정으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느것이 아닌가?

 

'아까 왜 그냥 갔어요?

내가 늦게 들어온 것이  기분 나쁘요?'

이불 속으로 들어오며 따지듯이 묻는다.


이건 아니다.

'저... 저녁 먹고서....'

 이렇게 변명이 시작되면 버럭 소리를 지르던지 '잠깐'하고 말을 잘라 놓고 시작하려던 나의 계산은 빗나갔다. 난 불행히도 아내의 이 '적반하장'의 전략에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아내의 이 예기치 않은 당당함에 당황까지 했었나보다.

 

'아니, 내가 왜 뭐라 그랬나,  나 암말두 않했어..'

반사적으로 이 말을 뱉어놓고 후회하였다.

내가 잘못한 것 하나 없음에도 이건 수세도 이만저만한 수세가 아니다.

왜 초전에 이렇게 밀리는지 그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모양새 다 구겨지고 보니 첨부터 선제공격으로 나갈걸 하고 후회하였지만 때는 늦었다.


 생각 많은 나와는 달리 아내는 등돌려 돌아눕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이건 아니다. 왜 이리 싱겁게 내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이 엄청난 아내의 잘못을 그냥 묵인하다 못해 정당화 시켜줘야 하는가?

피곤을 해도 내가 더 피곤해야 할 일이다 만 정신은 새록새록 맑아오고 분노도 아니고 굳이 표현하자면 짚이는 거 하나 없이 허망한 생각에 잠은 멀리 달아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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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니 아내와 싸운 기억이 가물 하다

그만큼 아내에게 자비로운 지아비였다는 얘기다.

어느적에던가?

신혼시절이었다. 초임지였던 경상도 어느 소도시 두칸짜리 방에 전세 들어 살 때였다.

늦은 귀가로 아내의 잔소리와 함께 받아놓은 밥상을 엎었던 적이 있었다.

 우루르 반찬이 그릇과 엉켜서 방바닥에 흩어지고 금방 이불 속에서 꺼낸 올린 스텐레스 밥그릇은 용케도 뚜겅이 열리지 않은 채 떼구르르 방구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때 아내의 겁먹은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홧김에도  이 여자, 참으로 순하고 착하다는 생각에 절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참을걸 하는 후회를 두고두고 하였었다.


 그러던 아내가 회식을 빙자해서 자정이 다되어 가는 이 야심한 시각까지 가무를 즐기다가 그것도 모자라 동네 한가운데까지 보아란 듯이 택시 잡아타고 개선장군처럼 귀가를 한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보리수 아래서 도 닦았을 리도 없거니와 착하디 착한 아내가 어찌 저리 변했을꼬?

 

멀리 갈 것까지도 없다.  지난 일요일 아침이었으니까

 

'여보 나 일 저질렀어, 어떡하문 좋아'

늦잠 자고 있던 내게 아내가 방문을 열고 말했다.

 

'차 조수석 문짝  왕창 해먹었어!... '

잠은 이미 깨었으나 일어나기 싫어 누워있던 내게 말로는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눈만 멀뚱거리고 누워있었다.

 

'장승배기 트럭 피해가려다가 너무 ...'

 잔뜩 주눅들어 조심스레 꺼낸 아내의 이야기는 큰아이를 태워다 주고 오는 길에 동네입구 장승배기에 세워놓은 트럭을 비켜가려다 조수석쪽 문짝을 긁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다 낡아빠진 차 문짝 해먹은 것이 무슨 대수야

괜한 걱정말구   놀랬을지도 모르니 청심환이나 챙겨 먹어..'

그리 해 놓고서  늦은 아침 먹고  나가보니 생각보다 상태는 훨씬 심했었다.

'문짝 긁혔다' 소리를 못하고 굳이 '왕창 해먹었다'고 이야기한 속내를 짐작하면서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 야트막한 잠에 대한 미련과 바꾼 것이 얼마나 애절통한 일인가?

이제 생각하면 무엇하리오, 이 일이 아니더라도 만약 잠을 포기하고 나가 보았다면 내 성질에 그냥 곱게 넘어가진 않았으리라 하였다.


후에 아내는 농담 삼아 말했었다.

'후후 당신이란 남자 보기보다 괜찮은 구석이 있네'

 

'??'

 

'난 되게 혼날 줄 알고 각오 단단히 했었는데 대범한 데가 있어!'

 

 

                                   4

 

 

이튿날 아침

아내는 잠을 깨우면서 내게 또 다시 묻는다.

 

'어제 내가 늦게 들어온 것이 기분 나쁘요?'

 

'아니'

 

'근데 왜 얼굴이 못마땅한 표정이지?  이 참에  이불이나 한번 개봐요'


......................

 

아하! 둔한 인간 같으니...

그렇다.

어제 아이를 데려오는 한시간 동안

나는 줄곧 이 여자를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조질 것인가 그것에만 몰두해 있었다.

 

여자들의 식사시간

더구나 시간 정해 놓고 먹는 것이 아닌 바에야 오죽했으랴!

밥먹는건 여벌이고 거기서 오간 얘기 속에 대책 없이 그리 늦게까지 게기기야 했겠는가?

 무슨 비책이라도 있었겠다하다가 사람이 변해도 하룻밤새 어찌 저리 변할 수 있을 것이며 더더욱 내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잔뜩 별러 놓았던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기분 나쁘요?' 이 한마디에 '그래 기분 나쁘다'소리 한번 못해보고 삼풍 주저앉듯 무너져 내린 자신의 모습이었다.

 

'뭐해요 얼른 이불 개고 씻으라니깐'

요 위에 책상다리하고 앉아 멍하니 앉아있는 내게 한마디 오금을 박고 아내는 부엌으로 향했다.

 

'이불이라?!'

 

 오늘 아침 난 그 여자와 같은 방을 쓴 이후 처음으로 이불을 갰다.

장롱을 열고 이불을 얹고 마지막 베개 두 개를 중간에 우겨 넣을 때는 손까지 떨렸다. 어렵게 타이밍 잡어서 아침 숟가락을 밥상 위에 올려놓았으나 '그리키 먹구서 한나절을 어띠키 바울라구 그랴'라는 엄니 말씀을 들으면서 휴대전화 챙기러 방으로 들어오니 아내가 서랍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내 주민등록증이 어디 갔지?'

엊그제부터 아내는 주민등록증을 찾고 있었다.

 

묻노니 아내여!

어제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잃어버린줄 모르게 잃어버린 것이 어디 당신의 주민등록증뿐이랴


아직은 내가 지니고 있어야할 가부장권 그 서랍에 혹 없는지.............

 

 

조강


 

  [2002년5월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