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이틀간의 기록 혹은 이틀간의 추억
슬하에 삼남 삼녀를 두신 우리 어머니
그 중 삼남을 오월 보리 베는 이 바쁜 계절에 우리를 세상에 내 보내 주신 은덕을 기리고자 아들 삼형제가 합심하여 그의 자녀들과 함께 열 셋이서 날 잡아 모인 것이 작년 이맘때였다.
어여삐 여기신 속리산 산신령님께서 좋은 바람과 물과 햇살을 내어주신 덕에 아주 뜻 깊게 보낼 수 있었고
그간 산신령님들 간의 말씀이 오갔는지 웬만하면 한번 댕겨가라는 덕유산 산신령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어 못이기는 척 자동차 몰고 간 것이 무주구천동 입구의 어느 펜션이었다.
믿고 있었던 콘도 예약이 어그러지면서 급히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선정한 그 펜션은 아주 깔끔하고 멋있는 통나무 지붕의 고급스런 펜션아래 폐교 직전의 초등학교 교사처럼 낡고 적당히 지저분한 곳이었다.
한쪽이 닫히면 반드시 한쪽이 열린다는 이 공평의 원칙은 다행스럽게도 순간의 실망을 다행으로 바꾸어 놓는다.
내부는 의외로 깨끗했고 예기치 않은 일로 결석자가 네 명이나 발생하여 두 개를 예약했던 방을 한 개만 사용하면 안 되겠냐는 말에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편한 데로 하시라 시원스레 말씀하시는 분은 이집 안사장님이었다.
아홉 명이 사용하기 딱 좋을 만큼 방 하나가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방마다 해우소가 딸려있어 해우하기에도 큰 불편이 없었다. 게다가 같은 방 쓰는 여인과 동갑이라는 안사장님은 숯불구이에 필요한 장비와 숯 일체를 무료로 제공해 주었고 불까지 친절하게 붙여줬으며 아주 오래된 나무로 만든 식탁과 의자가 일체로 된 탁자까지 제공받았다.
게다가 첫사랑에 눈먼 연인처럼 대책 없이 타오르는 숯불을 안정적으로 유지시켜 고기를 제대로 구워내기 위해서는 페트병에 물 넣은 다음 뚜껑에 구멍 뚫어 물총 쏘듯, 아이 오줌눟듯 조절하면 된다는 비법도 전수받았다.
서울장안의 이름난 대핵교 선생님이신 장남이 먹다 남은 양주를 기꺼이 희사한 덕에 맥주 섞어 듣기만 하던 폭탄주까지 만들어 마시기도 하고 3kg들이 미세분말 가루 농약을 300평에 고루 뿌리는 기능보유자 불초 조강이 소금 뿌려 구워대는 고기에 어찌 간이 맞지 않으랴!
덕분에 팔십 하나 되신 어머니부터 열셋 된 조카에 이르기 까지 생애 이렇게 맛있는 술과 고기는 처음이라는 찬사가 이어지고 여기저기 배 두들겨 가며 먹는 소리에 아닌 밤중에 웬 북소린가 이웃들이 창을 열고 내다보기까지 하였다.
설거지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 과일 깎아 먹는데 안사장님이 인사차 들렀다며 들어와 앉는다.
찾아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이쯤이면 됐다 싶은데도 말씀이 길어지는데 가만 보니 혀가 약간 고부라진 목소리다. 감사하다. 뭘 그것 같고 그러냐. 그래도 그렇지. 등등의 얘기가 오갈 즈음 마당 구석 큰 대야에 잔뜩 담겨져 있던 다슬기를 가져다 내일 아침 국 끓여 드시라는 말에 아내의 귀가 번쩍 뜨인다.
부추를 넣어야 제격인데 부추가 없으니 그 옆에 대파라도 가져다 먹으면 된다하고 친정어머니가 보내줬다는 마늘도 거기 있으니 먹을 만큼 까먹으란다. 그것 갖고 부족함이 있었던지 된장도 주랴하는 말에 아내는 된장은 있다 그러고 또 했던 얘기 시작을 하는데 으레 그러하듯 시집와서 고생한 얘기부터 아들이 여친과 헤어진 얘기까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 줄줄이 풀어놓는데 어찌나 재미있게 얘길 하던지 넋 놓고 편안히 들으면서 울다웃다하였다.
이튿날
아침은 주인마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잊지 않으면서 올갱이국으로 해장을 하고 남은 양주 어찌하나하는 걱정 덜고자 동생과 둘이 두 말 않고 입 벌리고 털어 넣었다.
곤돌라 타러 가는 길.
곤돌라는 무엇이고 리프트는 무엇이냐는 의문에 열세 살 장조카가 곤돌라는 자동차같이 안이 사방으로 막힌 것이고 리프트는 그네처럼 사방이 트여 의자에 앉아 올라가는 것이라 하는데 보란 듯이 곤돌라 옆에 리프트가 보였다.
퇴행성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팔십하나 되신 어머니
이렇게 하지 않고는 저 높은 곳에 오르실 방법이 없는데 일전 라디오에서 어느 산엔가 케이블카 설치 문제를 놓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토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땐 그래도 웬만하면 자연그대로가 좋지 않겠는가!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곤돌라 없으면 우리 어머니같은 분들 남은 생에 언제 이런 곳에 오르실 수 있겠나 싶어 금새 찬성파가 된다.
중국 천문산에 놓여진 그 엄청난 규모보단 작지만 산위의 건물과 풍경 자연 그대로 어울리게 잘 꾸며 놓았고
구름이 일었다 스러지는 사이 아스라이 내려다 뵈는 풍경이 잠시 보였다 금새 사라진다.
이곳저곳 앉았거나 서거나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장난도 치고 사진도 찍고 그러기를 한참이나 하다가
목이나 축여보자는 제안에 묵 안주에 동동주 마시고 나니 그래도 사는것 같이 사는갑다했다.
다시 펜션에 돌아와 남은 밥에 라면 끓여 말아먹고 짐 챙겨 떠날 준비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내 자식”으로 혹은 “우리”로 한 집에 살았던 형제간이었는데
오십 여년 세월에 이제 각자 마련하고 눌러앉은 터전으로 떠나기 전
제각기 노모 끌어안고 건강하시라 축원 드리고 조카들 머리 쓰다듬으며 공부 잘하라 이르고
아쉬움 잔뜩 남은 얼굴로 작별을 한다.
다들 떠난 자리
이제 우리도 가야지
잔금을 치러야 하는데 이 주인 마나님은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 돈을 받으려는 건지 말려는 건지 보이지를 않는다.
한참을 지나서야 앞치마 두른 차림으로 나오는데 우린 본체도 안하고 새로 온 손님에게 주려는 듯 묵은지 잔뜩 쟁반에 담아 갖고 저만치 간다.
불러 세워 사정하다시피 잔돈 건네고 보니 어제 얻은 다슬기 아직도 큰 대야 가득하고 옆에 갖다먹으라는 마늘도 그대로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인지 구분이 가기 힘든 이 마나님의 펜션 경영 방침에 손으로 가서 주인같이 지낸 이틀은 내 집같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무주......아마도 그래서 무주라 부르나 보다.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