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면서 부르는 노래

이년전 혹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

조강옹 2019. 12. 23. 17:30

직장이 격일제 근무이고 보니 일상이 월요일과 일요일의 반복이다.

그 일요일 아침 느지막히 퇴근하고 나니 딱히 할일이 없다.

같은 방 쓰는 여인은 출근했고 칠십 여섯되신 노모께서는 마당에 앉아 풀을 뽑고 계셨다.

좀체로 하지 않으시던 일이다.


마루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하늘이 까매지더니 금새 소나기 한 줄금 후줄끈 지나간다.

늘 그렇듯이 점심은 모자간에 마주앉아 먹는다.

식사중에 말씀이 계셨다.

어저께 고부간에 대형 충돌사고가 일어났다는것이다.

말씀의 요지는 같은방 쓰는 여인에게  분명한 잘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이나 사죄는커녕  단순히 이를 지적했다는 이유만으로 감히 맞장을 뜨려했다는 것이며 어쩔 수 없이 힘에서 밀렸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으므로  저녁에 재차 일전을 겨룰 예정이라는 것.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상대가 녹녹치 않으니 형편 닿는대로 도와달라는 말씀이셨다.

알다시피 이런 부탁은 처음 아니냐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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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방 쓰는 여인은 예정된 시각보다 삼십분 일찍 퇴근하였다.

따라서 저녁도 삽십분 일찍 먹었고 과일도 삼십분 일찍 나왔다.

칠십여섯되신 노모께서 먼저 칼을 빼 들었다.


“어저께 얘긴디.... ”


“그게요....”


한 치의 간격을 두고 일진 일퇴의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논리도 경우도 밀려나고 고성을 동반한 체력전으로 접어들자 칠십여섯되신 노모께서 밀리는 기세다.

이 즈음 마흔 일곱된 아들이  휘슬을 꺼내 불었다.


“잠깐!!”


같은 방 쓰는 여인과 같이 산지 21년!

그 중 심판 생활 19년!

경기를 잠시 중단시키고 난 처음으로 칠십여섯되신 노모의 손을 들어주었다.

오랜 세월 같은 방을 썼기에 묵시적인 교감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소 뻣뻣한 ‘같은방쓰는 여인의 사과’를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이미 권위를 잃은 칠십여섯되신 노모께서 받아들이셨다.

어둠이 내렸다.

아내는 냉장고에 있는 산사춘 한 병을 꼭 마시고 싶다하였으나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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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밥상에 깻잎장이 올라왔다.

칠십여섯되신 노모께서 깻잎장을 집어들자 같은 방 쓰는 여인이 젓가락으로 떼어주었다.

이번엔 같은 방 쓰는 여인이 깻잎장을 집어들었고 칠십여섯된 노모께서 떼어주신다.

나란히 밥숟갈 위에 올려놓고 먹으면서 웃동네 붓돌이 아부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얘기와 옆집에서 수박을 한 통 가져왔는데 껍질이 두껍다는 얘기를 번갈아 한다.

 

분명코 하룻밤이 지났는데 어제는 아주 오랜 옛날이 되어버렸다.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