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에서 부르는 노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는 조치원역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김천에서 올라오는 통근열차를 이용하여 출근합니다.

조강옹 2019. 12. 23. 17:34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는 조치원역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김천에서 올라오는 통근열차를 이용하여 출근합니다.

무궁화열차로 20분이면 도착할 천안까지, 통근열차는 퇴행성관절염 환자처럼 때로는 물꼬 보러가는 늙은 농부처럼 쉬엄 쉬엄 반시간에 걸쳐 올라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열차가 전의역을 출발하여 얼마쯤 지나면 앞칸에서 한 여인이 내가 타고 있는 칸으로 건너옵니다.

등에는 조그만 배낭을 지고 다리를 약간 절면서 걸어오는 그 여인에게 주목을 한 것은 그 커다란 눈망울하며 어디서 본듯한 얼굴의 윤곽 때문입니다.

또한 왜 매일같이 전의역을 출발하면 뒤칸으로 오는지, 것도 자꾸만 궁금해져갔습니다.
것도 잠시, 그 여인이 내리면 이내 잊고 다음 출근 때 또 그 여인을 봅니다.
그러면 또 궁금해하다 금새 잊고.... 이런 일이 일상처럼 반복되었습니다.

열차가 전의를 출발하자 오늘도 어김없이 그 여인이 내 칸으로 왔습니다.

한산한 차내
옆에 앉은 젊은이는 양 귀에다 이어폰를 꽂고 양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열차는 소정리역에 도착했고 여인은 뒤뚱거리며 내리고 차문은 닫혔습니다.
일순간 조용해진 차안에 이 노래가 아련히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옆 젊은이의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리였습니다.

순간 나는 운명처럼 조금 전 내린 그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다리를 절며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개 걷히듯 머릿속이 말끔해지면서 떠오르는 기억 하나-
그녀 일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녀였습니다.


스무 몇 해전
육군하사 계급장 달린 군복 다려입고 나왔던 말년휴가
오랜 준비운동 끝에 출발선 앞에선 육상선수처럼 잔뜩 긴장해 가지고
아랫녘에 살던- 내가 사랑한, 나를 사랑한- 그 소녀 집에 인사 차 갔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면접은 학력 난에 들어가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적되었고 나는 볼이 멘 채 그래도 누구보다 잘 살 자신이 있노라 ....

미덥지 못해 하시던 그녀의 부모 앞에 거북한 침묵이 흐르고
이를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살그머니 일어나 음악을 틀던 여인
그때 흘러나오던 노래 ................

곤경에서 음악으로 나를 건져 내주었고
내 사랑했던 소녀 말고 유일하게 내게 우호적이었던 그녀의 언니

스무 몇 해가 지난 오늘 아침 그때 그 여인과 음악이 다시 저와 만났는데
사람은 내리고 출발하는 열차의 엔진음에 음악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여름은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