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와서 부르는 노래

남도 육백릿길- 낙안읍성 이야기

조강옹 2019. 12. 25. 06:22

낙안읍성이라 하였는데 삼국지중 "낙양성"이 뇌리에 박혔는지라  낙양성이라 말이샌다.

입구에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니 주군의 명을 받들어 홀홀단신 적진으로 들어가는 사자인양

긴장된탓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아주 다행스럽게 오른쪽켠에서 신발 멀리차기 경기를 하는 아해들덕에 서서 구경하며 한참을

웃었다.

 

 

비고란에 무료입장 자격요건이 적혔는지라 내외가 눈을 씻고 읽어봐도  우리에게 해당하는

요건이 없는지라 지갑을 꺼내들었다.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지붕이는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다.

"썩은새" 니 "이엉"이니 "용마루"니 하는, 이제는 고어가 되어버린 옛적 언어들

저 어리럽고 고된 작업이 끝난 날 저녁이면 질펀하게 막걸리 잔치가 벌어지고

집주인은 적어도 일년, 길게는 이삼년 비와도 물샐 걱정 없다는 안도감으로 모처럼

베게 높여베고 깊고 편한 잠을 이루었던 시절들

기억은 다시 돌이킬수 있어도 한번 흘러간 시절은 다시 오기 어려우리라!

 

 

아이들은 무심코 그냥 지나치는데 젊은 시절 쇠죽 끓여 대던 지난날의 아낙들

코뚜레도 잡아보며 그 시절을 회상하나니........ 

 

동헌엔 사또가 이방 옆에 두고 죄인을 문책하고 있었다.

이미 죗값을 치루고 힘에 겨워 누워있는 죄인에게 다가가 위로하는 안해의 저 행위는

백성의 아픔을 달래는 자애로움인가?  인권을 무시한 성추행인가?

 

사또의 물음에 이방이 아뢰기를

"아무래도 전자인듯 하옵니다."

 

길가 텃밭엔 목화가 심겨져 있었다.

당시에 국제법이란게 있었던가?

지금같으면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될 문익점선생의 "절도행위"

그덕에 추운 겨울 쉽게 날수 있었노라 배웠는데 이젠 여기서 간신이 명을 유지하고있다.

 

어렵사리 명을 유지하고 있는것이 목화뿐만이 아니었다.

판소리를 맥을 잇는 사람들

마루에 앉은 두 여자분이 잠시후에 "흥보가"를 불렀는데 난 끝까지 듣고 싶었는데

안해가 자꾸 가자고 조르는 바람에 마지못해 궁딩이 털고 일어나야 했다.

 

 

 

꽃중에 알흠답지 아니한 꽃이 어디있겠나만

장미가 되었든 야생화가 되었든 붉은꽃이 제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저런 골목길 한바퀴 돌면 누구네 저녁 반찬은 무엇이고

누구네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다들 알고서 모르는 듯 지내던 시절

그래서 우리 식구 다음엔 우리동네 사람이라며 스스로 울타리 삼던 시절

 

 

아침나절 송광사

기와집과 산과 나무가 어우러져 거슬리지 않는 조화를 보았는데

 

같은 날 오후

저 초가집의 지붕과 빛깔이 산과 나무와 하늘과 송광사 기와집 못지않게 어우러진 모습

사람 또한 한복의 선으로 일조하며 살아왔던 지난 시절이 애틋함으로 다가온 낙양성 아니,  낙안읍성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