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호텔 507호에서
나 방금 독한 술 한 잔 마셨네.
아내가 옆에 자고있어.
전에 얘기한 그 술, 병뚜껑을 열었어.
반은 줄었나봐, 왠지 밤잠 설치는 계곡물 소리는 들려오질 않어.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소리, 그려 나 지금 강원도 홍천
들어는 봤어도 와보지는 못한 강원도 땅, 그 어디쯤 러브호텔 507호에서 이 글을 쓴다네.
참 좋으이!
꿈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말이여, 나 오늘 부석사 거쳐 예까지 왔어.
내집 마당에 세워놓은 차에 올라, 발바닥 흙 한 번 묻히지 않구 세시간 남짓이면 올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여겼지, 그만큼 세상이 좋아진거지 아무렴.
부석사 가는 길.
길옆으로 사과밭이 있었어.
대략 스무 몇 해전 나 거기에 간 적이 있다네.
인옥이..
발령 받고서 두 달 남짓 하숙집 누이.
그 누이가 날 거기 데려간 것이 그 해 늦가을이었어.
즐비한 사과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려있고 길가에 소복히 쌓아놓은 무더기에서 제일 크고 빨간 사과 골라 내게 건네주었어.
얼마 전 신문에서 부석사에 관한 글을 읽고 문득 그곳이 가고싶었어.
그래서 부랴부랴 갔던 게야.
입구 은행나무 사이로 난 길 따라 걸을 때 앞서가던 젊은 아낙이 아이에게 말했어.
'야야, 널짰다'
난 문득 오래전에 세상 떠난 친구하나를 떠올렸지.
그 친구하고 단양에 일을 보러 간 적이 있었어.
열차에서 내려 집찰구로 향하던 길, 앞서 가던 할아버지 한 분의 보따리에서 무언가가 하나 '툭'하고 떨어졌어.
'할베요 널짰니더'
충청도 할아버지 그 연세 되시도록 경상도 방언의 '널짰다'란 소릴 들어보지 못하셨던지 두리번거리는데 그 친구는 연신 '널짰니더'만 연발하고...
아이는 '널짰던' 모자 주워들고 앞장서 가고 봉황산 위 하늘은 잔뜩 흐려있었어.
난 속이 좀 탔지.
매미소리 요란하게 들려오고 앞서 가는 사람들 말씨가 여기 경상도이고 우린 집에서 한참이나 멀리 나왔다는 생각, 안양루 계단을 오르면서 극락 가는 길이 이리 되었을까?
아래선 분명 위층인데 다 오르고 나니 올라온 곳은 평지고 발아래 올라온 길이 있으니
왼쪽으로 돌아 난 떨리는 가슴으로 고개를 돌렸어 안양루 오른켠이었지.
그려 바로 저것이었어.
하늘은 용케도 저 멀리 희미한 산등성 겹겹이 허리 곡선까지 보여주었어.
옅은 구름이 살짝 가린 것이 오히려 신비를 더했고..
이 너른 부석사 경내 여기 저기 사람들 북적이는데 왜 이 자리, 아주 특별한 자리, 어쩌면 줄서서 기다려가면서 보아도 시원치 않을 이 자리가 이리 한산할까?
스무 몇 해전 나 또한 그랬듯이 무량수전 부처께선 비켜서 계셨어.
아내가 절을 하자 그러더군.
세속의 욕심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 내 새끼 하나 복되게 해달라고 빌었어. 덜어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주워 담고서 조사당 오르는 길이 무거울 수밖에..
'뽕나무에요'
아내의 말에 허리통 만한 기둥줄기 좇아 올라가다 보니 가지 끝은 이미 하늘에 미쳤어. 태백산 주목이 살어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 하였던가?
평생 말 한마디 아니하고 바람에 가지나 흔들어 주면서 살지라도 죽어서까지도 천년이면 이 세상 느긋하니 나무탈 쓰고 다녀가는 것이 낫겠다도 싶어.
다시 안양루로 내려왔어.
이보다 높은 자리도 낮은 자리도 옆으로 조금만 비켜서도 보여주지 않는 그 자리에 다시 섰어.
오직 이 자리라야만 누군가의 표현대로 공룡의 등떼기 같은 모든 산맥들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 어찌 보면 흩어진 것 같으면서도 겹겹이 모여있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 세상 만류 중에 오직 나 하나만이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아주 특별한 대우'를 받는구나 마냥 감격에 겨울밖에...
미안해 오늘따라 술이 땡기네 그려.
한잔 마시고 계속함세.
............
근데 왜 홍천에 와 있냐고 그랬나?
얼마전 양구에 다녀간 적이 있어.
그 땅의 산과 물에 반해서 다시 오마 벼르던 차에 부석거쳐 예까지 한달음에 올라왔어.
아뿔사!
지도 한 장 갖고 인재로 넘어가려던 나의 계획은- 그래서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깊숙한 골짜기 어디에다 작은집 지어놓고 밤새 골골거리는 물소리 벗삼아 독한 술 한 병 다 비우려던 나의 계획은 일장 춘몽으로 끝났어
예서 한양이 이백오십리- 이미 나보다 더 일찍 서두른 사람들이 여기 있었고 그들끼리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해 길을 메운 차량 행렬들, 한계령이고 진부령이고 다 물 건너보내고 해는 이미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어.
산 그림자 길어지면 짙어지는 것이 어둠말고 무어 또 있겠는가?
결국은 이 길가 러브호텔 507호에 방 잡아 놓고 이 글을 쓰고 있다네.
부석사 얘길 좀더 해야겠어.
안양루를 떠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을 보았는가?
무량수전 네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나무기둥을 보았는가?
아까 얘기대로 죽어천년 나무가 무거운 지붕을 떠 받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십년 조금 넘긴 내 사는 집도 이제 새집 지을 때가 되었다고 오가는 사람들 이야기하는데 나무가 죽어서 천년을 버틴다고?
아냐, 소백산이다 태백산이다 그건 그들을 아주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인간들이 생각 없이 이름한 거고 봉황산 그 낮은 자리에서 뭇 산맥들을 다스려 떠받치게 한거야. 우리가 국수 먹을 때 젓가락 이용하듯 단지 그 나무 베어 배흘림기둥 깎아서 받치고 있을 뿐이야.
저 산들을 더 낮은 자세로 꿇어 엎드리게 한 것은 안양루 무량수전이 스스로 낮은 곳에 터를 잡고 있기 때문이야.
마흔 다섯 이 여름 머지않아 돌아가야 할 이 짧은 생 돌아갈 땐 돌아가라고
부석 그 커다란 돌멩이 그래서 바위라 불러야 하는데 우린 그냥 부석이라 부르고 있어.
살포시 눈뜨다 시피 떠올라 있는 그 자리에서 모두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하여, 스쳐 지나가는 군상들이 경내임에도 모자를 눌러쓰고 삐리릭 손전화 받아가며 남녀가 엉키듯 허리 감고 불안스레 저들끼리 허상들을 보면서 어지러이 오갈 때 그 무리들 제껴놓고 마흔다섯 이 나이 세상살이 일찌감치 지쳐버린 촌부에게 잠시 자리 내어 내려다 볼 수 있게 배려한 것은 내겐 다시없는 영광 아닌가?
또 한잔 마시고....
무량수전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이고 부석사 경내의 건물 배치와 서로의 어우러짐, 그런 거 난 아직 몰라. 범종루에서 올려다본 안양루와 무량수전 그 뒤 산의 곡선이 조화되어 아름다움의 극치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난 눈뜬 봉사여.
아내가 깨었어.
에어컨을 꺼 달래. 틀면 좀 썰렁하고 끄면 좀 덥고 그래 지금 날씨가
일어난 김에 한잔하고
인옥이...
아까 얘기한 하숙집 누이말여 그 얘기 좀더 해야겠어.
그 누이 덕에 스무 몇 해전 내가 부석사에 왔었다고 이야기 했잖은가
그 집이 허름한 중국집이었고 주방장과 그 누이의 혼자된 어머니, 또 혼자된 언니의 그 조카가 초등학생이었을 거야.
좀 복잡한 집에 미혼이었던 그 누이가 실세이고 가장이었던 셈이야.
그녀가 왜 부석사에 날 데리고 갔는지 몰라.
어둑할 때 우린 부석사에서 내려왔고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여기 다녀갔다는 말 아무에게도 하지 않기로 쉽게 합의를 했지.
후에 군에 다녀와서 복직하였을 때 그 소도시는 몰라보게 발전하여 중국집은 헐리고 그 자리엔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어.
어느 저녁에 시내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출입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그 누이가 들어오는 거야, 짧게 눈이 마주쳤어.
술집 주인과 몇 마디 나누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그녀가 인옥이 누이였고 내가 알은체를 하기도 전에 나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거야, 순식간의 일이었지. 주인보고 방금 다녀간 사람 누구냐고 어디 사냐고 물었어.
씩 웃더니 옆집 (상호이름은 생각나지 않아) 안사장님이라고 가르쳐 주더군.
자리가 파하고 그 집에 찾아들었어 그 누이가 거기 있었지.
나 알아보겠냐구 아까 나 알아봤냐구 그랬더니 알아봤데.
말 마디 마디 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나마 몇 마디 나눌 사이도 없이 안에서 부르는 소리에 금새 일어나 가더라구.
문득 비친 얼굴 그려, 그 중국집 시절 주방장이었어.
누이는 그 주방장과 결혼을 했던 거야.
하숙하던 때가 고등학교 갓졸업했을 때였으니까 학생같이 여겼던지
누이는 내게 자주 말했어.
세상은 보기보다 험하다, 결코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그 주방장, 하숙시절 몇 번인가 늦은 밤 술 취해서 혼자된 그 언니한테 막말하고 대드는 거 몇 번 보았던 터라 익히 짐작이 가. 힘들어 보이던 인옥이 누이의 얼굴 아직도 눈에 선해.
또 한잔 마시고..
나 이 밤이 새면 돌아갈 거야.
이니스프리의 호도란 시 생각나. 나 그렇게 돌아갈 거야.
거기 음봉산 야트막한 산등성이 잠들어 계신 아버지 산소 오가며 내 처지가 불우하다 탓하지 아니하고 너른 들 소리 없이 흘러가는 미호천 강물 처럼 유유히 살다 가려하네.
홍천강물이 서둘러 흘러감이 갈 길이 멀어서가 아닐 게야.
내 사는 미호천 강물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것이 어찌 바다가 가까워서 일까?
낮은 곳으로 스스로 처할 줄 아는 존재들이 그 자리에서 가장 높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안양루 오른쪽 켠 스무 몇 해전 그 인옥이 누이가 거기 서 있었어.
저 먼산 그 등허리가 하늘과 맞닿아 있음을 보면서 '외연과 내포가 가장 먼 양극에서 조화 통일을 이루는 것' 어찌 시에만 해당되는 말이겠어.
떠오르는 돌 옆에 위 아래로 아주 오래 전 선승의 꺠달음으로 만들어 놓은 이 건축물은 정말로 아주 오래 전부터 하늘과 땅과 화해하면서 서로 아우르고 살라하고 어서 오라, 보아라, 이렇게 살아라....
지금 대략 오십 조금 넘었을 인옥 누이는 그렇게 살고 있으리라 믿고 싶어.
또 한잔 마셔야 겠네.
가는길에 배를 타고 싶어. 오던 길 돌아서 월악산 자락
산과, 하늘이 버린 물이 만나 가장 아름답게 하늘을 담고 있는 곳.
오다가 충주호 스쳐 지나면서 잠깐 봐 놓은 곳이 있어.
거기 가는 길은 배를 타야하고 다행히 거기에 배가 있었어.
나 거기 갈 거야 마흔 다섯 이 여름밤이 새면 술도 바닥이 나겠지.
술도 아껴야겠지만 지면도 좀 아껴야 겠네. 준비해온 메모지 여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무작정 생각을 뱉어내고 그것을 글로 다 옮기기엔 남은 여백이 너무 적어.
적당히 궁핍한 것이 내겐 늘 견디기 알맞을 만큼의 긴장으로 다가오지.
어쩔 수 없이 이것을 즐기는 방법도 터득했고.
냉장고 열어보니 물이 세 병있네.
술 마신 이후 갈증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안도해도 되겠어.
이 러브호텔은 창이 참 멋이있어.
여닫이 식으로 자그마한 창문인데 위엔 반원형으로 되어있거든.
그 자그마한 창문으로 홍천이 죄다 보여. 생각보다 크고 괜찮아 아름다워.
하기사 방 한 칸 들여다보는데 열쇠구멍 하나로 족하듯이
세상을 내다보는 창도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얼만큼 다가가서 보느냐가 문제네 그랴.
참! 나 지금 비더레즈 셔츠 입고 있네.
사람들은 너무 짧은 시간 여럿이 입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벗어놓고 입질 않아.
혼자 입고 다니기가 좀 그렇네.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집에서만 입다가 나설 때는 벗어놓나?
하기사 세상에 의구한 것이 산천말구 또 무엇이 있을 것이며 조석으로 변하는데 사람 맘 좆아갈것이 또 어디있을라구 ....
주무시게, 나도 그만 잘티니께..
2002/8/6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