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와서 부르는 노래

필리핀-진갑 노인의 넋두리 2

조강옹 2020. 1. 22. 08:57

 

 

 

 

패키지 여행처럼 촘촘하게 짜인 일정도 없었고

비행기타고 너댓 시간 날아 와 오롯이 셋 집이 모여 앉았다는 오붓함이 더했다.

이곳 클라크에서의 나흘밤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렇게 둘러앉아 자정을 넘겨가며 지난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후에 다시 만난 일행들은 하나같이 이번 여행의 최대 수확은 이 늦은 시간까지의 "끝장 수다"라며 당시의 시간과 장소

를 그리워 하기까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 다녀왔다는 말에 경비가 얼마들었냐 묻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랑 갔으며 어디가서 무엇을 보았느냐는 묻지도 않은채 "비싸다"했다.
 

생덱쥐베리의 어린왕자에 "숫자 좋아하는 어른" 얘기가 나온다.

어른들에게는 "장미및 벽돌로 지어졌고, 창문에는 제라늄꽃이 피어있으며,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앉아있는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런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것 같아보인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2만달러짜리 집

을 보았다."라고 말을 하면 그들은 "정말 굉장한 집이구나!"하고 감탄할것이다.


그 또한 숫자 좋아하는 어른인데  두세 배 부풀려 얘기 할걸 ........그랬다.

 

 

 

 

 

누군가 온천을 가자했다.

더운 나라, 여름날씨에 어디 갈데없어 온천이냐며 내심 마뜩찮은 마음으로 찾아간 곳

정해진 금액에 따라 접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기다리고 있던 종업원이 비닐 봉투에 벗어놓은 옷을 챙켜 갔다.

야외 뷔페식당이 있었으며 점심은 온천을 다녀와 먹기로했다.

 


 
일곱 명이 타는 지프는 굴러가는 것이 신기하리만치 노후됐으며 중간에 토착민 마을 처럼 보이는 동네가 나오고 이어지

는 길은 오지탐험하듯 협곡사이로 난 물 흐르는 길을 따라 계속됐다.

뒤에 탄 사람 아랑곳 아니하고 굽은길에서는 맞은 편 차가 올것을 대비해 경적 요란하게 울려가면서 손에 쥐가 나도록

빠른 속도로 달리는 바람에 무엇이든 움켜 잡지 않으면 안될 만큼 흔들렸다.

 

 

 

 

차가 하도 흔들려 시간을 짐작키 어려웠으나 대략 삽십여분 족히 걸렸다.

계곡의 끝은 산밑 양쪽으로 경사따라 계단식으로 탕이 하나씩 만들어져있다.

적잖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 모여 온천을 즐기고 있었으나 커다란 규모탓에 외려 한산해 보였다.

 


맨위에 산신각 처럼 보이는 곳을 들여다 보니 안에 위패 하나 모셔져있고 그곳에 한자로 씌었으되

"현비유인 진주강씨 신위"라 적혀있다.

아무리 신출귀몰하는 "귀신"이랄지라도 참 멀리도 모셔왔고나하는 생각과 함께

오는 길에 이 험난한 길을 튼것이 우리나라 건설업체라 얼핏 들은것을 소재삼아 이와 관련된 책임있는 사람과 연관된

애틋한 사연 하나 담겨있는것은 아닌가 짐작할 뿐이었다.

 

 

 

 

한 나절 걱정없이 노닐다가 가는 길은 오던 길 되돌아 가는 길이다.

토착민 마을 언덕에 마련된 모래찜질장 저렇게 덥혀진 모래로 생매장하듯 덮는다.

한 삽 한 삽 몸 위에 쌓이는 모래더미의 중압감에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심장뛰는 소리가 의외로 크게 느껴졌고 묘하게도

시계가는 소리와 연상되었던지 때가 지났다는 생각에 시장기가 느껴졌다.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잔다"는 노랫말 처럼 넓지도 쾌적하지도 않은 이곳에서 아이들은 잘도 뛰놀았다.

 

 

 

 

늦은 점심은 차려진 밥상에 시장기가 더해 맛이있었다.

숙소로 향하는 창밖에 재래시장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가끔씩 담벼락에 쳐진 빨랫줄에 널린 빨래들은

그다지 청결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 기준으로 불법 개조된 오토바이에 온 가족이 올라타고 경적울리며 지나가거나 가게 앞에 의자놓고 벗은 몸으로 앉아

있는 노인들


같은 시대 살아가는 세상살인데 저들에 비하면 내 처지는 한결 낫다는 굳이 감출것까진 없지만 웬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대적 행복감정이 처치 곤란인 와중에

   
개 한 마리 벗 삼아 길 가는 낭인 하나 눈에 들어온다.

지금 당장

아니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날도 

딱히 해야 할 일도, 서둘러 갈야 할 곳도 없으므로 어깨에 지워진 배낭 마저 가벼워 보인다.


그렇지!

내 처지

이미 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나 또한 무엇을 욕심낼것이며 걱정하고 서두르리오.

 

 

 

이른 새벽

잠이 깨는 어느날은

저 필리핀 해변의 돌멩이처럼 정신이 맑아오는 날이있다.
.
.
.
.

바야흐로 노년이다.

일손 놓은 그날 이후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없다. 오늘보다 나을 내일 또한 없으오리다.

하되, 이 모두 내려놓으면 저 낭인의 발걸음 처럼 가벼워지리라.

저 해변의 돌멩이 처럼 맑고 깨끗한 정신만 온전히 지니고 살아가면 되리라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