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이 사랑한 옥천- 향수 호수길
옥천하면 떠오르는 것
육영수 생가
지용의 고향
이 두 가지로 요약될법한데 어느것이 먼저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것이다.
그냥 "둘 다"라고 속편하게 둘러대고 웃어넘기는 것이 상책이려니 하자
대전과 청주의 첫머리를 따서 이름했을것 같은 대청호가 생기고서
위 두 가지에다 굳이 하나 덧붙이자면 대청호를 연상할 수도 있겠다.
문화의 고장이기에 지용에다 방점을 둔 모양이다.
옥천 인근 대청호 주변에 향수 호수길이라 이름한 탐방로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2020년 3월 14일 오전이다.
지용은 1902년 옥천에서 태어나 11살에 장가갔다한다.
일본 유학에 카톨릭 신자로 세례까지 받았다하니 그 시대 "있는 집안"에서 자란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문인들과 사귀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이라 부르는 동족상잔의 광풍속에 납북 여부와 사인이 모호하여 정*용이라 불렸다
올림픽이 열리던 해 비로소 그의 시 "향수"가 교과서에 실렸다.
이후 이동원과 박인수에 의해 노래로 불려지기도 했다.
건너편 마을 풍경과 탐방로 곳곳에 지용의 시를 접하면서 애틋함이 전해져 온다.
내 사는 세상 이전의 세상은 곧 내 부모사 살아낸 세상은 내 살아온 세상보다 험하고 힘들었다.
육십을 훌쩍 넘어 세상의 뒤켠에 물러나 앉아서도 가끔씩 술좌석에서, 혹은 친구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우린 복받은 세대라 자위한다.
한때 "낀 세대"라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식으로 부터 버림받는 최초의 세대라 동정받던 시절도 있었지만
작금의 청년실업과 더불어 자녀들이 살아내는 세상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더 힘들고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세상, 만족이냐 불만족이냐는 혹은 행이냐 불행이냐는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여부에 기준을 둔 우리세대보다 세상과 그 세상에서 스스로 설정한 기대치에 얼마만큼 미치느냐 미치지 못하느에 따라 판단기준이 설정된 탓이리라!
갇혀있다 모처럼 밖에 나오니 특사로 풀려난 수인처럼 생각이 많아진다.
때이른 봄이건만 포근한 날씨에다 햇살 또한 더없이 눈부셨고 따사로웠다.
물건너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볼을 간지르며 지나갔다.
새집에서 풍겨나는 새집 증후군 처럼 곳곳에 엊그제 삽질한 듯 새길의 흔적이 보이지만 따라 걷다 보면 물에 갇히기 전 오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개에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고 옛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걷는 재미도 있다.
대략 한 시간 여 족히 걸었다.
성급히 만들고 개방한 길인 모양이다.
낙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별도의 안전조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라는 전제아래 중도에 길을 막았다.
오던 길 되돌아 가는 길이다.
햇살은 더 따사롭고 바람은 더 삽상해졌다.
올적 놓친 풍경 새로이 눈에 새기고 걷는 길은 올적 갈적 가볍기 그지없다.
"나는 듯이 걷다"라는 표현이 멀고 급한길 서둘러 잘 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만은 아닌듯하는 생각이 얼핏들었다.
정지용 생가
동쪽벌 넓은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백여년 쯤의 실개천이 이리 변했을 것이다.
머릿속에 "향수"를 읊조리며 햇살이고 서있는 모습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도
사철 발벗은 아내도
짚베게 돋아 고이시는 지용의 아버지도 이곳에 없다.
해지고 어두워오면 밤하늘에 성근 별이나 있을려나........
장님 코끼리 만지듯 찾아 들어간 집에서 점심이 기대 이상 맛있었고
그 포만감과 착한 날씨와 햇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천은 기억속에 사철 발벗은 지용의 안해처럼 애틋함으로 남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