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한 달(9)- 섯알에 새겨진 제주의 아픔
송악산 전망대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남은 길 가다 되돌아보면 그린듯 아름다운 길 걸어왔다는 사실에 놀라고
목 좋은 쉼터에 앉으면 가파도와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눈앞에 있다.
마음이 맞아 여기까지 왔을 터이고 좋은 시간, 좋은 장소에 달리 할 말이 따로있겠나!
그저 “우리 여기 오길 참 잘했다 그치? 담에 또 오자!”
송악산을 한 바퀴 거진 돌았을 즈음 섯알오름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바닷가 절경의 잔상이 아직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몇 걸음 옮기다 보면 의외의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다크투어리즘 - 전쟁, 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
해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라 적혀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가 저항기지로 삼고자 알뜨르 비행장을 건설하고 고사포 진지를 구축했다한다.
올레 10코스 따라 가는 길
밭은 누군가에 의해 일구고 가꾸어 지는 듯 한데 인적없이 적막고요다.
적혔으되
왜정 때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구축한 최대의 탄약고였으며 해방 이후 미군에 의해 폭파된 곳이다.
나아가, 통칭 4.3 사건 때 1만 5천에서 3만 명 가량의 양민이 군경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이후 치안국의 예비검속 중 1천명 이상이 계엄군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한밤중에 무참히 총살된후
암매장 된 곳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던 고로 더러는 잊히기도 하고 더러는 아물기도 하련만
왜정치하의 압박과 한국 전쟁의 상처가 너무나 크고 깊어 영원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은 곳이다.
.......
더 말해 무엇 하랴!
중문에서 송악산 쪽으로 자전거 타고 가다 산방산 밑 비석에 탁본뜨듯 복사해 놓은 비문 하나 옮겨 적는다.
바람 속에서 43을 떠 올리며
강 방 영
아부지! 삼촌! 성! 아시! 가슴으로 날아든 총알, 흙으로 스며든 피,
밤중에 붉게 타던 하늘, 재로 사라진 마을, 엇갈린 바람들이 피를 불렀던 시절,
이이들 이끌고 동굴로 숨었다가 캄캄한 어둠이 된 동네 사람들,
축창 들고, 성담 쌓고, 삶의 뿌리를 지켜내자고 어둠 속에서 눈 부릅떠
찌르고 찔리는 공포의 밤들, 검은 재 구름이 하늘을 가리던 때,
넒은 들을 물들었던 피, 쓰러지던 억울함, 가슴 속 응어리와 못다 외친 함성.
이제 새로 부는 바람은 그 울음 대신 울고, 바위를 때리며 파도는 그 억울함 풀어라,
아득한 시간 뒤로 사라졌어도, 꿈속 고향 마을에는 살고있는 아부지! 삼촌! 성! 아시!
풀꽃 피는 올레 담에 그림자로 서성이고, 뒷산을 떠나는 상여 노래로 떠돌아.
묵은 상처로 속울음 우는 사람들, 기원은 늙은 팽나무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가운데,
새 봄 오는 한라산은 다시 푸르러, 노루 꿩 지나는 자리에 계절은 구절초를 피우며,
일어서는 억새 물결 사이로 새로 자란 아이들이 소리치며 빛을 향해 달리는 들판,
저 들에 노래하는 새, 익어가는 열매, 뜨겁게 가슴 속 불길도 환한 빛으로 비추도록,
한숨 쉬는 섬은 그리움의 파도 속에 당신들을 보내드립니다. 아부지! 삼촌! 성! 아시!
그 가슴 속 소망 새로은 날개를 달고, 드넓은 생명의 하늘로 올라 자유롭게 노래하시기를.
2009년 가을
이 땅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64년을 살아왔다.
모내기는 차라리 축제였고 벼 베어 말리고 뒤집고 묶어낸 볏단 소달구지에 실어 마당에 쌓아놓았다가
날 잡아 절구통 뒤집어 놓고 새끼줄로 묶은 볏단 터는 마당질까지 고된 노동을 감내하는 시절의 기억에서 부터
공업입국의 기치아래 산업화된 노동현장에 데뷔해 세월 따라 더해지는 경험과 경륜을 존중받으며 나름 자부심 갖고 일했으며
지식정보화시대에 접어들 즈음 나이가 찼고 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 메타버스 등등 급속히 변해가는 세상 따라 잡을 여력이 없어
스스로 “여기까지다"라고 포기를 선언하고 이태가 흘렀다.
우연찮게 "걷는 이"들을 목도하고 나도 따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바닷가로 난 길 따라 온종일 걷다 보면 무어 건지는 거 있겠나?
현무암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바람에 갈라지고 구부러지면서 살아낸 소나무 몇 그루
제주에 이렇게 너른 들이 있었나 싶게 눈앞에 펼쳐진 풍경
오름이라기엔 너무 밋밋하고 작은 섯알오름과 그 주변에 새겨진 제주의 깊고 아물지 않는 상처
극히 부분적으로 기계화된 들에 씨 뿌려 가꾸며 길가에 앉아 막걸리 마시던 사람들
세월을 거슬러 한참을 걸었던 길
월라봉 높은 곳에 신이 가꾸는 밭이나 낮은 곳 들판에 사람이 가꾸는 밭이나
해와 바람과 사람의 손길이 합작해 만든 정원 같은 풍경- 한 꺼플만 들추면 드러나는 제주의 아픔
눈앞의 절벽도 다가갈 수 있는데 까지 가보니 옆으로 난 좁은 문이 있었고
탁 트여 거칠 것 없을 것 같은 길 - 그 위에 새겨진 아픔을 읽고 나니 살얼음판 처럼 조심스럽고
까닭모를 설움 같은 것이 울컥 울컥 올라오다 가라앉기를 반복해 토해낼 듯 가던 길 멈추고 헛구역질 하며
그렇게 옮긴 걸음걸음에 몸보다도 마음이 더 무겁고 답답했던 하루 2021/10/06 일기는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