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면서 부르는 노래

마흔 세살의 일기 하나 - 내가 죄은 죄

조강옹 2019. 12. 23. 17:16

오메 나 죽겄네

쓰린 속을 움켜쥐고 희미한 기억의 저편, 공소장 읽어 내려가 듯 내가 죄은 죄를 훑어 내려간다.

부부동반 동문회 모임.... 작심하구 퍼넣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새도록 궥궥거렸다. 그럴 때면 어렴풋이 저승 문턱이 보이곤 했지...


조강지처는 아주 훈련이 잘돼있다.

뒤틀린 속을 어쩌지 못해 모로 눕는 기척만 있으면 영낙없이 걸레통으로 쓰는 플라스틱 바가지가 턱밑으로 자동으로 받쳐진다. 오랜 훈련(?)의 결과다. 항상 그랬다.

비맞은 중이 불경 독송하 듯 있는 욕 없는 욕 마구잡이로 퍼부어 대면서......


조강지처.. 추석쇠구 곧바루 직장이라구 한자리 얻어 나갔으니께 거지반 한 달이 되어간다.

어저께 아침에 퇴근하니 맞아주는 건 가이스키뿐 ...


웬수는 밥상도 안 채려 놓구 출근했다.

가스렌지 위에 마늘 넣어 끓인 미역국, 손잡이 떨어져 나간지 수 삼년 된 후라이팬에 기름 부어 놓구 계란 하나 뒹글 듯 웃고 있다.


냉장고 다 뒤져봐두 배추김치 하나뿐..

렌지에 불 붙이구 후라이 대충해서 상 채려 가지구 먹으려니 괜시리 목이 메인다.

밥상 들구 방으로 들어가 티뷔켜 놓구, 스포츠 신문 읽어가면서 식어빠진 미역국에 밥 한 공기 말아재켜 개 밥인 양 끼적거리며 먹었다.


이렇게 개 같은 조찬을 끝내고 상 내갈라구 방문을 연 순간, 에구구 무슨 화생방 훈련도 아닌데 마루며 부엌이며 연기가 자욱하다


에구.. 후라이팬...깨스렌지.... 상 놓구 후다닥 달려들어 불을 끄고, 행주 찾아 후라이팬 들어 싱크대에 팽개치구 수도꼭지를 틀어 놓구 환풍기 가동 시키구.....


일이 같지않아두 여간이 아니다.

그 웬수 최소한 30분 지겨운 잔소리 소재를 스스로 제공한 것이다.

그것도 주말 드라마두 아니구 미니 시리즈도 아니구, 짧게 잡아두 한 달짜리 일일연속극처럼 되풀이 하겄지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어디서 들은 기억이나 부엌에 신문지도 태워보구 스킨로숀 뿌려보구 할 것 다 해놓구 괜찮다 싶었는디 학교갔다 돌아온 아들놈 대뜸한다 소리가 무슨 냄새냐구 묻는다.

후라이팬은 마당으로 갖구나가 모래흙에 박박 문질르구 보니 워낙 색깔이 검은데다 헌것이라 개갈이 나지 않아 뒷곁에다 집어 던져 버렸다.


웬수 퇴근할 때 즈음 동구밖으로 나간다.

저기 저만치 어그적 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달려가서 서양식으로 인사를 한다.

'이 양반이 왜이란댜 발정난 개같이..'

우리 웬수는 참으로 뻔때가 없다.


"얼릉가자 시간 늦을라"

밖으로 도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 냄새가 코로 들어가랴 싶어 다구쳐 모임에 참석했었다.

그래서 퍼 넣었다. 참이슬이구 지랄이구 가릴것없이..

아침에 발광난 속은 여벌이구 웬수 눈치챌까 봐 똥싼 가이스키처럼 눈치만 실실 보니깐두루

웬수가 참으로 측은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쑥스럽기두 하구 어제죄은 죄가 들통날까봐 무섭기두 하구 ..

등뒤가 가려워옴을 느끼며 신발꿰고 있는디

"약사묵으소" 한마디 뱉는다.


일단은 탈출에 성공...

그래도 께름칙 하다.

자수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차안에서 전화기를 꺼낸다.


웬수가 받는다

"여보세요" 저승에서 들리는듯한 소리다.

"난디......"

"말해요"

얼덜결이라구 할까 순간적으로 느낀 공포감 때문이었을까 생각지도 않던 말이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저기 ...나 당신 사랑해"

"헛소리 하지말구 약이나 사 잡숴"

비명처럼 소리꽥지르고 이내 끊어버린다.


-마흔 세 살먹은 고달픈 인생의 시월 셋째주 일요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0년10월15일]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