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소설같은 얘기
아침 산책길의 시작은 전에 살던 동네 앞산 만한 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오르막 중간 쯤 모퉁이에 하얀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다.
그것보고 문득 생각이 났다.
영수네 집 앞에도 하얀 찔레꽃이 이렇게 무더기로 피어있었지.
모심는 날이었다.
이앙기는 일찌감치 논에다 박아두었다.
모판 떼어낸 못자리에 로터리를 쳐야 한 번에 모내기를 끝낼 수 있었으므로 모심기 전에
먼저 할 일이다.
경운기 끌어내어 로터리(흙을 잘게 부수는 기계) 맞춰 나가려는데 아내가 그랬다.
“영수엄마가 많이 아픈가봐요”
경숙이 누나…….
동네속이면서 외딴집
우리 집 위에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윗집이라 불렀다.
날 때부터 턱이 가슴패기에 붙다시피 해서 태어났다.
나보다 세 살 위였는데 숨 쉴 적마다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기억에 없이 일찍 돌아가셨고 스무너댓 집 모여 사는 동네에서 가장 가난했다.
남들 쌀밥 먹을 적에 보리밥 먹고 남들 보리밥 먹을 적에 감자 먹으며 자랐다.
가까이 다가오는 친구도 없고 다가 갈 친구도 없었으므로 늘상 울안에서 혼자 지냈고
닭이나 강아지와 같은 짐승들 벗삼아 지내다보니 자연 말 수가 적었다.
오랜 객지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검은 곰팡이로 시커멓게 변한 슬레이트 힘겹게 올라앉은 집에 그 누나와 비슷한 아픔을 갖고 태어난 남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
영수라 이름 진 딸 하나 예쁘고 착실하게 커서 참 다행이라 여겼었다.
동네사람들은 경숙이 에서 영수엄마라 바꾸어 불렀다.
오가며 뜨랑에 앉아 창백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는 걸 자주 봐왔다.
모내기 위해 담갔던 김치를 나누어 줄 요량으로 갔더니 많이 아프다는 것이다.
영수아빠가 물 건너 제지공장에 잡일 하는 자리 얻어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벌이가 시원치 않은것은 어쩌면 당연한것인지도 몰랐다..
못 견디겠다 싶을 때 마다 시내 의료원에 다녀오는 것도 그집 살림에는 벅찼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 모두 일찌감치 논밭으로 일 나가고 동네는 텅 비었다.
하던 일 멈추고 차 시동을 걸었다.
뒤로 돌아 들어가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니 늘 열려있는 사립문 옆에 찔레꽃 한 무더기 하얗게 피어있었다.
누나는 문가에 기대앉아 힘겹게 숨 쉬고 있었다.
“병원에 디리구 갈테니께 업혀”
부축해 걷기엔 거리도 멀고 얼른 다녀와서 모를 심어야 할 판이었다.
앞에서 등을 돌리고 쭈그려 앉아 손을 내밀었다.
“바쁠틴디…….”
기운이 없어선지 미안해선지 선뜻 업히지를 못한다.
아내가 부축해서 가까스로 내 등에 업혔다.
숨소리는 작아지고 가래 끓는 소리는 커졌다.
급한 마음만큼 차가 쉬 달리지를 못한다.
“바쁠틴디…….”
“많이 아퍼?”
내민 약봉지를 신호 걸려 멈춰선 새 들여다보니 누구라도 알아보는 결핵약이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
“약국에서 산겨?”
고통스런 얼굴에 고개만 끄덕 끄덕거렸다.
끼고 사는 병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중 하나가 결핵이라고 했다.
그 소릴 본인도 들은 모양이다.
약 먹으면 낫겠다 싶었는지 시내 약국에 가서 결핵약을 달라고 했단다.
돈 주고 달래는 사람이나 그렇다고 파는 사람이나
감기처럼 사나흘 약 먹고 떨어지는 병이 아니라는걸 어찌 몰랐을까?
울컥 분이 솟아 나는 걸 꿀꺽 삼켰다.
낯이 익어 익히 알고 있다는 듯한 의료원 여의사는
알고는 있지만 도리가 없다는 듯 의례적인 물음과 답변 끝에 주사 맞고 약 타서 나오는 길
“영양제라도 좀 맞으면 한결 낫겠는데…….”
의사가 뒤통수에 대고 한 말이 걸렸다.
그렇지만 이미 늦어진 모내기를 서둘러야 할 형편이었다.
망설이면서 집으로 돌아와 다시 윗집에다 업어 뉘이고 내려오려는데
아까보단 나아진 얼굴에 미안하다는듯 또 그랬다.
“바쁠틴디...”
“지발 그 소리 줌 그만햐”
사립문 나서는데 찔레꽃 향이 코끝을 찔러왔다.
팽하구 코를 풀고 나서도 막막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원 오가느라 까먹은 시간만큼 에누리 없이 늦어진 모내기
경운기 전조등을 켜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저녁상에 토끼탕이 올라왔다.
영수아빠는 집 둘레 동그라니 토끼장을 지어놓고 틈틈이 풀 베어다가 토끼를 먹였다.
궁색한 살림에 그나마 살아가는 유일한 숨통일터인데
뒤늦게 얘기 듣고는 고맙다며 토끼 한 마리 가죽 벗겨 갖고 왔다는 것이다.
쯧…….
맥주컵에 소주 가득부어 마셨다.
젓가락으로 고깃건데기를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고 숟가락 집어 국물을 안주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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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짙어가는 만큼 그녀의 병은 깊어갔던 모양이다.
이파리 누렇게 타들어가던 모가 땅내 맡고 생기 돌 즈음
간밤에 119차가 와서 영수 엄마가 병원에 실려갔다고 했다.
한 사날 줄창 비가 내리고 햇빛 화사하게 내려쬐던 날
가짓거름 줄 요량으로 오토바이에 비료짝을 얹고 있는데
택시 한 대가 들어와 영수네 집앞에 멈춰선다.
웬일인가 싶어 쳐다보는데 영수아빠가 울먹이며 손짓한다.
쫒아가 보니 이미 뻣뻣해진 경숙이 누나가 마네킹 처럼 뒷좌석에 앉아있다.
둘이서 차에서 끌어 내렸다.
생애,
기름진 음식 한 번 배불리 먹어 보기나 했을까?
거울 앞에 서서 몸에 붙는 얇은 옷 한 번 걸쳐 보기나 했을까?
맘속에 담아둔 말 누구 붙잡고 속 시원히 털어 놔 보지도 못하고
천사 같은 마음씨 하나만 찔레꽃인 양 대문 옆에 걸어놓고
그것 못미더워 울안서만 지낸 세월이 오십년이다.
천상에서 지체 높은 공주마마로 살다가 어쩔 수 없이 죄은 죄가있어
이 세상, 사람탈 쓰고 내려왔다가 “이제 됐으니 그만 올라오라”
노염 풀린 “아바마마”의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닐까?
“늬엄마 같이 착하구 훌륭한 분두 벨루 읎지... 좋은디루 가셨을껴... 그리니께 용기 잃지 말구.... 열심히 살어야 햐.”
훌쩍이며 어깨 들썩이던 영수는 재작년 좋은 사람 만났다더니 올봄에 애기엄마가 되었다고 했다.
나중에 들었다.
그때, 하도 기운이 없어서 병원에 링거 한 병 맞고 갔으면 참 좋으련만
바쁜 사람 차 얻어 탄 것만 해도 어딘데 염치가 없어 차마 그 말을 못했다고....
“이왕 늦은 거 들렀다 왔으면 좋았을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어딜가나 찔레꽃은 이렇게 무더기로 피어나네.”
뒤따르던 아내의 말이 맞다싶어 돌아 보는데
“바쁠틴디....”
누나는 간곳없고
하이얀 찔레꽃만 무더기로 피어있다.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