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4

폭싹 속았수다.

자명종도 잠든 새벽 내 잠은 깨져라!쪽방으로 건너와 네플릭스를 연다.내가 찾았던 제주 이전의 제주 이야기가송송송 벌집처럼 현무암 구멍 속에 잠들었던 이야기애벌레 되어 기어나 오듯 펼쳐지는 이야기 엊그제 이바지 음식으로 받은 찰떡처럼 찰지기도 하고고장이 난 시계가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열겠다며대통령 되었던 조강의 사단장 노태우를 가리킨다.  시집 못 간 갑돌이와 갑순이가 달 보고 울었다는육짓것들의 사랑 얘기와는 사뭇 다르게관식이와 애순이는 장가가고 시집왔다.금명이 은명이 동명이 낳고도 늘 바람 불고 비 오는 제주 어지럽게 어제와 오늘을 오가며 펼쳐지는 시간여행 눈물이 빗물 되어 가슴을 적시다가콕콕콕 위산과다 위벽 헐어내듯 쓰린 속 후벼내는 아픔도 있다. 외돌개에서 서귀포여중 쪽으로 방향 잡고 쪼매가..

삶의 편린 2025.03.16

제주에서 한 달(최종회)- 천국으로 가는 계단 영실

두어 번 다녀간 길이고 산이기에 만만치 않다는 생각으로 발만 보고 오르다가 문득 뒤돌아 본 걸어온 길이 저랬고 앞으로 가야할 길 올려다 본 풍경이 저랬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란 영화도 있었고 소설도 있었다. 그만큼 계단 딛고 오르는 아름다운 길이 예말고 또 있다는 얘기겠지만 그곳이 어디에 있건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을거라했다. 넋을 놓은 사람은 비단 나뿐이 아닌듯했다. 작금 날씨가 고르지 못했고 어떤 날은 비가 온다하여 배낭을 매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대개가 병아리 오줌만큼 찔끔 내린 비로 하루를 공친데 대해 속상해했다. 모레면 이제 뭍으로 가야하는 날이었고 요행이 날씨가 좋았다. 늦은 삼월 두어 차례 반쯤 눈 녹은 이 길을 나는 좋아했다. 그때 그 길이 가을에 이런 모습으로 단장하고 나..

제주에서 한 달(8) - 논짓물에서 월라봉까지

오늘은 서쪽으로 가리라 작정하고 나온 아침 바닷가로 난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난간에까지 공을 많이 들인 다리 건너 너른 포장도로 따라 "뽄때"없이 바다로 가는 것인가? 하는 실망이 들 즈음 왼쪽으로 감추어 놓은 듯 길이 하나 나오고 이 길로 다시 돌아온다면 배낭 벗어 놓고 곤한 다리 한참을 쉬어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절로 발이 시려오는 곳을 지나면서 곳곳이 아늑한 쉼터에 아침 산책길로는 더할나위없는 좋은 길 따라 내려간다. 왕수천 바다까지 동행을 약속한 듯 흐르는 물 따라 가는데 고삐 풀린 망아지 쫒아가듯 물은 늘 저만치 앞서 흐른다. 바다는 탁 트였고 불어오는 바람 따라 한참을 걸었다. 잠시 쉬어가기로 이만한 곳이 있을까? 앙증맞은 자그마한 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련된 쉼터에 배낭을 풀었다. ..

카테고리 없음 2022.01.05

제주에서 한 달(7)- 버치냐?

외돌개에서 쇠소깍 방향으로 이어 걷기로 했다. 정방폭포에서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려야했는데 두어 개 지나쳤다. 길을 잃었다는 순간의 당혹감은 조용하고 깨끗한 도심의 아침풍경에 금방 잊었다. 바닷가쪽으로 어림짐작 방향을 잡았는데 햇살을 등지고 걸어오는 유니폼 차림의 노인과 마주쳤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인들 무거우랴! 늙기도 서러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 송강 - 과학문명의 발달은 노인들이 이고 진 짐을 모두 내려놓게 만들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존경받으며 세상을 이끌었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묻고 배우며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아야 하는 더 큰 짐을 지게되었다. 와중에 저렇게 깔끔하게 유니폼을 갖춰입고 ..

제주도에서 한 달(3)- 내려다 보기 위해 오른 송악산

자전거 타고 송악산으로 가는 길은 봄에 산방산 쪽으로 내려오던 길을 더듬어 올라가는 길이다. 길도 거슬러 올라가고 시간도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풍경들과 사람들이 보인다. 그럼에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보다 뒤돌아본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 그래서 자전거 세우고 카메라 꺼내들기 일쑤다. 이후 서쪽으로 걸을 때마다 불끈 솟아오르듯 봉긋한 송악산은 한라산과 더불어 어디서든 눈에 들어왔다. 저 밑 정자에 자전거를 놓고 송악산을 오른다. "제주에는 도둑이 없습니다." 안덕 창천에서 하룻밤 묵기로 하고 자전거를 어찌할까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안주인은 웃으면서 말했었다. "혹여 누가 집어가지나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되돌아보면서 자전거의 안녕을 확인한다. 늙은 탓이다. 송악산 전망대 오..

제주에서 한 달(2)- 산방산에서 쓰는 편지

하늘에 무지개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할지어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願)하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천생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질진저……. ​ - 윌리엄 워즈워드 - 아침 우유를 사러 나왔다가 무지개를 보았다. 내용 중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말이 화두처럼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무지개를 본 아침에 가슴이 뛰지 않으면 목숨을 거두어 가달란 기도 같은 말에 노년임에도 아직 가슴이 뛰는 나는 목숨을 부지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뿌듯하기 까지 했다. 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나는 무지개를 보았고 내 가슴은 뛰었다네. 바라옵나니 오늘 하루가 천생의 경건한 마음으..

제주에서 한 달-걷기 위해 날아가다.

"나 제주에 다녀오면 안 될까"" 느닷없는 내 물음에 "그렇게 하슈!" 아내는 아주 쉽게 허락(?)했다.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을 것을 알기때문이라 했다. 그렇게 제주에 왔다. 지난 9월 29일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싸고 좋은 것은 없다지만 가난한 백수에게 저렴하면서도 썩 괜찮은 숙소가 좋은 인연으로 내게 연결되었다. 올 사월이었다. 자전거로 제주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작정하고 섬에 왔었다. "샵"에서 빌린 자전거로 2박 3일 240여km를 씩씩하게 돌았다. 둘쨋날 남원쯤이었을 게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괜찮다싶어 자전거를 멈추고 지나쳐 온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뷰파인더에 배낭매고 걸어오는 거한이 눈에 띄었다. 셔터를 누르고 가던 길 가기에는 그 "거한"이 내게 너무 가까이 다가..

제주- 그 그리움에 대하여

안녕 제주! 나는 내일 뭍으로 간다, 가서는 바람 따라 파도가 하얗게 거품 물며 아무리 “때리고 부수고 무너뜨려도” “임처럼 꿈쩍도 않던” 현무암처럼 까맣게 잊고 살다가 불현듯 아직도 거기 바람부는지 감자꽃 하얗게 핀 밭고랑 따라 김 매던 할망들 옷 걸린 밭둑에 혼자 서 있던 나무 더불어 그대로 강녕하신지 “임처럼 꿈쩍도 않던” 현무암처럼 까맣게 잊고 살다가 다 올라선 영실 오르막 고사목 되어 장승처럼 서 있던 구상나무 아직 거기 그대로 벗은 채로 서 있는지 “임처럼 꿈쩍도 않던” 현무암처럼 까맣게 잊고 살다가 월령삼거리 버스 세워 오르던 저지오름 묘지 돌담에 노랗게 피어나던 키 작은 그 꽃,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지 바람 따라 파도가 하얗게 거품 물며 아무리 “때리고 부수고 무너뜨려도” “임처럼 ..

자전거로 제주 한 바퀴(최종)

. 이른 아침 함덕쪽으로 가는 길은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약하지만 뒤에서 불었다. 누구는 삼대가 덕을 쌓은 모양이라 하고 누구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보다 하였다. . 저 낯익은 언덕길 저 낯익은 풍경 마치 고향에 온 듯 반가웠다. 일전 제주에의 한 달을 내내 이 부근에서 머물렀던 터라 자주 찾던 곳 이른 아침임에도 새벽잠 없는 엄마와 아이가 텐트밖에 나와있었다. 남은 거리 대략 25km다. 이쯤이면 기어선들 못 가랴! 역풍인들 못 가랴! 김녕을 출발할 때부터 아킬레스컨의 통증이 남아있어 걱정했는데 몸마저 건방이 들었던지 각 부위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견딜만했다. . 고개를 돌리거나 길이 방향이 바뀌어 눈에 들어오는 아침 풍경은 이내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시간이 넉넉했으므로..

자전거로 제주 한 바퀴(2)

. 간밤 잘 잤다. 엊저녁 숙소에 들기까지 아주 신속하도 효율적인 협상을 통해 성공리에 흥정이 끝나자 자전거는 1층 홀 안에 두면 된다고 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커다란 눈망울에 총기 넘기는 안주인은 자물쇠를 채우려 번호키를 주물럭거리는 내게 "제주에는 도둑이 없습니다." 머쓱해진 나는 묻지도 않음에도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떠나겠다고 말하면서 3층 숙소로 올라왔다. 이튿날 아침 과연 자전거는 그대로 있었고 문은 열려있었다. 도망치듯 숙소를 빠져나와 어제 보아둔 작은 가게에서 김밥 한 줄을 사서 거지처럼 서서 먹었다. 영화 기생충의 "지하실의 여자"와 닮은 인상의 쥔아주머니는 잠시잠깐의 내 얘기를 듣더니 그 나이에 대단하다며 놀멍쉬 멍 잘 다녀가시라 큰누님 같이 인사를 했다. 그 표정과 말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