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7

늦은 안부

근계시하 초동지절에 조강 삼가 아뢰옵니다. 거지반 다 왔을 터인데 동장군은 선뜻 문턱을 넘지 않고 밖에서 두리번거리는 것이 요즘 날씨가 아닌가 합니다. 아직도 자다 깨 정신이 맑아 오는 새벽이면 수양버들 늘어진 병영사 입구부터 수렴동 연화봉 석굴까지 열흘간의 장정이 완행열차 차창 밖 풍경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퇴직 이후 코로나 팬덤 거치면서 스스로 걱정할 정도로 급격히 저하된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듯해서 기쁘고 죽기 전에 꼭 가봐야겠다 벼르시던 누이와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에 내 잘못인 양 송구한 마음입니다.  내 생애 소중한 기억이 화석처럼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바닥난 기억력 속의 잔해 박박 긁다시피 해서 사진 붙여 몇 줄씩 얹어보지만, 필치가 예전같지 아니함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세월을 비켜가지..

삶의 편린 2024.12.15

아주 늦은 답신

자고나면 벌판에 공장이 들어서고 벌집처럼 그만큼의 일자리가 늘어나던 시절 땀 흘려 일하면 하는 만큼 에누리없이 댓가가 주어지고 그래서 나름 열심히 살면서 결혼하고 자식 낳아 키우면서 내 집 하나씩 마련하고 비로소 꿈을 이루었다고 흡족해 하던 시절 농경시대에서 산업화로 들어갈 즈음이 내 청년시절이었습니다. 노태우정권이 내 걸었던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실감하기도 했고요. 이어, 누구나 내 차를 가질 수 있어 원하는 곳을 날개 달린 새들처럼 자유로이 나다닐 수 있고 인터넷을 이용한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것 모두를 얻을 수 있는 지식정보화시대로의 전환은 조물주가 선심 쓰듯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내려준 요술방망이와 다를 것 없는 축복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고나면 있던 일자리도 ..

삶의 편린 2024.05.27

임태주시인의 어머니의 편지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 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

삶의 편린 202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