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들어보았으되 처음 접해보는 방생법회
풀어주어야 할 생이 필요했던 참에 갇힌 생, 담긴 생을 들고 어부가 우리에게로 왔다.
수요가 있은곳엔 항상 공급이 있다.
이른 봄날 이른 아침 강가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어부와 스님들간의 일년에 단 한차례의 거래
인연이라 했던가?
너른 강물속 오르락 내리락 유유자적할 생이 빨간 고무다라이에 갇혀버렸다.
어찧다가 이리되었는지 연유는 알수 없으되 인연이 엉켜버린것이다.
오래전에 정해놓은 격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듣고 나서야 전에 익히 들었으되 외지는 못한 천수경이다.
하기사 살아가면서 듣고서도 외지 못하는 것이 어디 천수경뿐이겠는가?
대낮에 밝힌다고 해서 그 환함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라했다.
전에 언뜻 주워들은것이 생각났다.
우리 욕심으로 채워진 어두운 마음속을 밝히고자 함이라!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되 짜고 치는 고스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유야 어찌되었건 갇혀있던 생을 본디 있던곳으로 놓아보내는 선행
불교를 일컬어 흔히들 깨달음의 좋교라 한다.
맞다.
저 이른 아침 남한강변까지 올라와 갇힌 물고기 물가로 풀어주는 선행을 지켜보며
우리 생이 때론 불편부당하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살아가는 것 또한 저 물고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고무다라이 같은 이 세상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닌가?
또 누군가에 의해 우리 생이 저 너른 하늘로 놓여져
때론 제트기 보다 빠르게 광속으로 날기도 하고 때론 높이 날아오른 솔개처럼 유유자적 날갯짓하며 여유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방생이란 다름아닌
강에 놓여지는 물고기 처럼 우리의 생도 그렇게 놓여져
너른 세상 마음껏 활개치며 살고지게 해달라는 기도 아니겠는가?
물가에서의 생각은 물가를 떠나면
얇은 편짓장 처럼 쉬 접혀지는 법이다.
.............
신륵사라했다.
천년고찰이라 하니 전해 내려오는 얘기도 많고, 많은 만큼 믿음이 가지 않는 얘기도 많을터,
홀로 걸어가는 스님
엊그제 동안거도 해제되었거니와 날씨 또한 삽상하니 걸음걸이가 가벼워보인다.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스님의 약속과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하겠다는 중생의 약속
금방 손가락 걸어 언약이라도 있었던 양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여여롭기 그지없다.
사물이 아직은 잠에서 덜 깨어난듯한 이른 봄
뿌리에서 야금 야금 스며드는 눈 녹은 물 빨아 가지로 밀어내는 이 계절
쉬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지 못하기는 저 나무나 사람이나 매 한가지이다.
원하는 바 누구에게나 있으되 그것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결국 자신과의 약속이자 다짐이기도 하다는 걸 저 소저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저재작년쯤 되었을게다.
아랫녘
송광사 다녀오고나서 부터
용마루에서 부터 줄지어 흘러내리는듯 한 기왓장이 그려내는 곡선과 아무렇게나 서 있는 주변의 나무와 하늘이 어우러져 그려내는 그림 하나 하나가 찰칵 찰칵 소리내며 카메라속 메모리카드에 한장 한장 사진되어 새겨지듯 뇌리에 저장되는 것이다.
담과 벽을 생각한다.
벽은 겨우내 토굴속에서 면벽수행에도 깨치지 못하는 화두라면
담은 넘어서는 안되는 경계이긴 하지만 들여다 보는 것을 허하는
그러나 종아리 쥐나도록 까치발 높이뜨고 들여다 보아도 성이 차지 않는 인색한 경계
지난 계절의 추위로 빛이 바랜것이 어디 풀이며 나무들 뿐이겠는가?
벽화도 단청도 적당히 빛이 바랜것이 묘하게도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이 있는 풍경과 사람이 없는 풍경은 천양지차
두런두런 사람소리 들려오는 궁금한 풍경도 나름 좋고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의 그 고요함과 쓸쓸함도 좋다.
봄의 어원은 보다의 명사형이 아닐까?
이런 생각 가끔한다.
그런 의미에서의 오늘 봄을 보았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노골노골노골
하늘 높이 날아올라 노골노골 우짖던 노고지리는 제비와 더불어 사라진지 오래지만
내 유년 시절
겨우내 동네 사랑방에서 권련말아 나누어 피면서
새끼를 꼬거나 꼰 새끼로 멧방석을 말거나 화톳장 뒤집던 이땅의 아버지들을
호밋자루 손에 들려 밭으로 불러내던 그 노고지리 소리가 들려오는 듯
자꾸만 고개들어 하늘을 올려보다가 아까 강으로 돌려보낸 물고기의 안부가 궁금해져 온다.
우리가 오늘 그러했듯 언제 누가 우리의 생을 더 넓은 곳으로 풀어놓아줄까?
어리석은 중생 아직도 욕심 하나 쉬 털어내지 못하는데
일주문 앞 기골이 장대한 스님 한 분
그 모두가 쓸데없는 잡념이라 깨끗히 털어버려야 한다는듯
이미 가라앉은 티끌 하나 까지 일궈가며 뽀얗게 길바닥을 쓸어내고 있었다.
2014. 2.23 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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