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최근 집계로 160만의 도민이 오손 도손 모여사는 곳
그러기에 심장부인 청주 일원에 위성 처럼 읍소재지들이 산재해있다.
내사는 오창이 그러하고 내수가 그러하며 남으로 옥천,영동,보은이그러하고 북으로 증평, 괴산, 음성이 또한 그러하다.
이중, 오창에서 괴산거쳐 연풍으로 가는 길은 수안보를 거치지 아니하고 경상도로 넘어가는 지름길이기도 하거니와 일년에 서너 차례 안동 처가 갈적 주로 이용하는 길이기도 하다.
괴산 지나 연풍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쌍곡 계곡 이정표가 나온다.
호젓한 외줄기 계곡따라 난 산길따라 올라가다 보면 눈 앞에 펼쳐지는 산수가 범상치 아니하다.
높은 산과 맑은 계곡물이 어우러진 풍광에 탄성을 질러가며 한참을 올라가다보면 왼쪽으로 공터 하나 나온다.
미처 챙기지 못한 소용닿는 물건들을 팔기도 하고 끼니를 거른 사람을 위해 식사도 가능한 식당도 눈에 띈다.
거기에 차를 대놓고 밑으로 흐르는 내를 건너는 것으로 칠보산 산행은 시작된다.
때가 때인지라!
봄처녀 댕기 풀러 표식삼아 걸쳐 놓은듯 진달래 무더기 지나 돌다리 건너는 걸음이 가볍다.
휴일임에도 인적이 뜸한지라!
전속모델 앞세우고 가다 보면 탐방지원센터 나온다.
겨울에서 이른 봄까지의 대부분의 냇물과 저수지 물들은 이렇게 맑다.
옥빛 살짝 드리운 ... 명경지수!
이를 달리 이름할수 있겠는가?
얼떨결에 손을 담갔다가 그 차가움에 흠칫 놀란다.
아주 잠깐
맛뵈기 식으로 늘어선 메테세콰이어 열병식!
산을 오르는 길은 정상을 위에다 두고 반 시계방향으로 계곡따라 빙 둘러서 가는 길이다.
계곡이 적잖게 깊고 나무 또한 무성하니 자연, 정상이 어딘지 뵈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것이 참 믿음이려니 하면서 계곡사이로 내려오는 물을 때로는 왼쪽에다 두고 오르다가 때로는 오른쪽으로 건너면서 길따라 간다.
세어보니 오를적 여섯번 내려올적 여섯번
열두번 물길 건너는 것이 칠보산의 산행이기도 하다.
누구는 저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 할지 모르겠으나
베개 없이 주무시는데 팔베게 삼으시라는 정성이라 생각하면 다소나마 위안이 되지 않겠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루할 정도로 완만한 계곡 물소리 위안삼아 한참을 오르다 보면 경사가 급해지고
보폭을 강제하는 이 계단길이 시작된다.
계단길 끝에 오르면 이정표 하나 나온다.
아까 차를 대놓은곳이 절말이라 하는 곳이니 얼추 십여리 올라왔고 정상이 칠백여미터 남았다.
가끔씩 등허리가 시릴 정도의 찬바람이 맞은것 하고 끊임없이 소래내며 흐르는 물소리
이제 겨우 싹을 내밀려 하는 나무가지들!
이곳에 오기까지 보고 들은것의 전부다.
때로는 노랑이 곱기로써 으뜸이라 여겨질때도 있다.
개나리 무더기로 피어난 곳에서도 그러하고 갈색 낙엽속에 피어난 야생화 댓 송이가 또한 그러하다.
이제 오른만큼의 수고에 대한 선물을 받는 자리
각연사다.
신라시대 지은 절이라하니 일천오백여년의 역사를 지니었고 전해져 내려오기로는 지을적에 까마귀가 목재를 물고 날아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 까마귀가 자주 난다.
문득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두 젊은이의 대화가 바람타고 들어온다.
"여긴 왜 이렇게 까마귀가 날지"
아주 똑똑한 친구가 옆에서 일러주기를
"사람덜이 요새 잡지를 않으니께 그렇지
몸에 좋다고 테레비에 방송만 한번 때려봐봐
저리키 날러댕길 까마귀가 어디 남어 나겄남. 죄다 포수 총 맞아 떨어졌지"
예전에 두어번 왔던고로 저쯤가면 무엇이 나올거다까지는 아니래도
처음엔 낯설다가 아 전에 여긴 이랬었지 하고 조각 맞추기를 한다.
여긴 전에 밧줄잡고 올라가야 했던 곳인데 이렇게 바뀌었다.
숨도 고를겸
저 철봉이며 발판이며 이고 지고 놓아준 사람들에게 잠시 감사한 마음으로 밑을 내려다 보았다.
그냥 풍상이라 하지만
초여름 날씨라고 하는 요즘에도 계곡따라 솟구치는 바람은 모질고 차다.
묵묵히 견디어낸 흔적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나무는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
모범 답안이 바로 저기 저렇게 의연히 서 있다.
꼭대기다.
게다가 험한 바위가 앞을 막고 있기에 사람들은 옆으로 비껴서 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를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다.
그 바위를 바람벽 삼아 오늘까지 살아낸 연세 많으신 소나무
철부지 손자가 할아버지 턱수염 잡듯 외람되게 걸터 앉아 양해없이 사진 한 방 찍는다.
들여다 보노라니 굵고 거친 농부의 손마디 처럼 단단한 철갑
애국가 2절 남산위의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바람서리에 불변하였을지라도
어찌 생각까지 없었을까?
속삭이는 바람따라 이리도 가고싶고 저리도 가고 싶다가
이윽고 비오고 천둥치는 어느 여름날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모양이다.
절을 찾는 목적이 대웅전에 앉아계신 부처님전 마음 가다듬고 삼귀의를 뇌이며 삼배 올리는데 있다면 오늘 칠보산을 찾은것은 저 노송을 졉견하고 그가 살아온 지난 이야기 듣는것으로도 족하다
생각은 갈라진 가지만큼 자꾸만 갈라지는데
내려오는 길에 놓여진 계단을 그럴줄 알았다는듯
이리 저리 방향 틀어 흐트러진듯 제대로 놓여져 있었다.
올라갈적 오던길 고대로 다시 내려오리라 작정하고 내려오는 길인데
올라갈적 놓치고갔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 언제 이렇게 큰 바위가 있었던가?!
여기 저기
물은 어디선가 나와서 밑으로 밑으로 소리내며 흐르고 있었다.
올라갈적 힘들었어도 내려오는 길은 뛰어 내려오던적도 있었는데
여기 저기 솟은 크고 작은 돌덩이 따라 내 딛는데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려온다.
산을 몰랐을적 멀쩡했던 다리가 산을 알기 시작할때 부터 탈이 나기 시작했다.
기구...
이정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얼마를 더 가야하는 지
우리 살아가는 것도 가끔씩 이렇게 이정표 보고 갈수 있다면,
없으면 뒤 따르는 아해들을 위해서라도 이정표 세워서라도 가야지.
사람이고 풍경이고 앞모습과 뒷모습이 이렇게 다르다.
이 풍경이고 사람은 앞모습 보다 뒷모습이 훨씬 아름답고 또한 보기에도 좋다.
하물며 뒷모습이 더 보기 좋은 사람과 풍경이 같이 어우러진 모습은 더 말해 무엇하랴!
초입이 가까워오는데
폭포하나 있었다. 쌍곡계곡에 있는 폭포이니 달리 이름할거 있나?
그냥 쌍곡폭포라고 순순히 이름이 붙여졌다.
진천 농다리가 대표적일것이다.
충청북도 사람들은 돌다리 하나 만큼은 참 잘 맹글어 놓았다.
오가는 이 누구 하나 두드려 보고 건너지 않아도 안심인듯 앞만 보고 건너가고 건너오고 하더라!
깊은 산속
이렇게 너른 공터
이정표에 절말이라 적었으니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절 한채 있었을터이다.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 전란속에 불타 없어지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곳으로 옮겨졌는데
사람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 보니 터만 남았겠고나 하였다.
산밖에서 봄옷이냐 겨울옷이냐 두고 망설이다 겨울옷 챙겨 입고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에다
추워하는 안해에게 망설이지 않고 선뜻 웃옷 벗어주어 모처럼 칭찬받은 사월 첫 주말
칠보산과 칠보산의 바위과 칠보산의 바람과 칠보산의 늙으신 소나무와 더불어 행복했던
내 생애 쉰 일곱번째 봄날 하루가 또 이렇게 가고 있었다.
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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