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와서 부르는 노래

주유천하1-난주로 가는 길

조강옹 2024. 11. 2. 03:59

 

꿈이였던가?

티벳 같이 갈 사람을 구한다는 말에 주위를 둘러봐도 손 드는 사람 하나 없다.

수학시간 어려운 시험문제 칠판에 적어놓고 풀어 볼 사람 손들라는 선생님 말씀이나 다름없었다.

 

망설임 끝에 용기내어 "저요!"

손들고 보니 나 혼자였다.

티뷔에서 보았던 라싸에 가는가보다 하였다.

 

결국은 같이 갈 사람을 구하던 이는 불의의 사고로 발을 다쳐 포기했고

여행지는 티벳이 아니라 티벳 가까이 여기저기 알아 본 즉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돌아다니는 여정이란다.

이리저리 꼬이고 엉켜 나를 포함해서 세 노인이 이렇게 일행이 되었다.

 

그중 한 분은 중국에 오래 거주했기에 중국어에 능통했고 중국무술과 역사와 무술의 고수라 들었다.

또 한 분은 파륜궁인가 하는 나중에 여행중에 들었지만 도교의 일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그쪽에 오랜기간 수련해 오는 분이라했다.

 

요는 나를 포함해서 이 세 노인이 충청와 경남에 거주하면서 서로 모르고 지내는 사이로

둘은 60대 후반이고 한 분은 70고개를 살짝 넘은 노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연유로 지원하여 함양에서 한 번 만나 상견례를 치르고 임신한 딸 아이 서둘러 혼사 치르듯

109일 인천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여행 전 준비와 과정의 전부였다.

 

이를 '주유천하'라 감히 이름짓고 일만 오천년전부터 구석기인들이 농사짓던 미호강가에서

열 네 마지기 논농사 짓고 사는 시골노인이 보고 듣고 온 얘기 -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하여, 24109일 꼭두새벽 리무진을 타고 청주서 인천공항까지 두 시간을 길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공항에서 만나 두어 시간 이리저리 오가며 정해진 절차를 밟고 가까스로 북경 다싱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리고 다시 두 시간을 하늘에 뿌리고 북경에 도착했다.

덤으로 한 시간 돌려받았다.

중국에서의 첫 선물이었다.

 

중국 승무원들은 키가 크고 예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킹처럼 표정 없이 안내했고 인사했다.

다만 다싱공항에 내릴 때 승무원 하나가 양손을 흔들며 "바이"하고 인사하는 것이 그중 나았지만 역시나 무표정이다.

"고객은 왕이다."라는 인식이 중국에는 없다고 옆에서 누군가 얘기해줬다.

 

입국심사 하는 과정에 제복을 입은 직원들은 어깨뽕 넣은 듯 권위 의식이 눈에 보였고

거기에 은근히 압도당해 오케이가 났을 때 운전면허시험 합격 때 느꼈던 "성취감"마저 느꼈다.

다싱공항은 크고 넓은 데 비해 이용객이 적은 탓에 너 넓고 커 보였다.

 

 

난주로 가는 길

예약해 놓은 열차 시간이 아직 여유가 있다기에 그래도 시설이 가장 깨끗한 공항에서 화장실에 다녀오고 양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역 앞을 서성이며 점심 먹을 식당을 찾다 그중 한군데 선택해서 들어갔다.

 

칼국수과의 중국에서의 첫 점심은 "고수"라 일러주던 향신료에서 나는 역한 냄새를 견디며 먹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 하는데 친해질 것 같지 않은 음식과의 타협

타협할 것이 어디 이 향신료뿐이겠나만 일행 둘은 맛있게 먹는 것을 훔쳐보면서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위는 오전 여덟시경 인천공항 의 모습이고 아래는  같은 날  11시 20분 경 중국 다싱공항 풍경이다. 

 

북경역 광장
북경역 내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도착한 북경역

규모로 세계 제일이란다.

지하철에서 본 중국의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영양상태가 좋아 얼굴이 뿌옇고 훤출한 키에 말쑥한 차림이다.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였으며 지하철 기관사가 운전대를 조작하는 것을 다 들여다 볼수있도록 개방되어있었다.

행여 취객이 난동이라도 부리면 기관사의 안전에 저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많은 승객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보다 안전한 운행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지하철역 승강장과 역사 내부 그리고 환승 통로는 필요 이상이다 싶을 정도로 크고 널널했다.

난주행 열차

 

열차내부

난주로 가는 열차다.

17시간 동안 낮이 밤으로 밤이 다시 낮으로 바뀌었다.

낮엔 통로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창밖을 구경하는데

승객들과 승무원들이 마치 방해하듯 무시로 지나갔다.

통로가 좁은 연유로 그때마다 엉거주춤 몸을 일어서거나  비틀어 지나가는데 협조해야했다.

저녁은 때가 되어 지나가는 판매원으로 부터 도시락을 사서 먹었다.

그런대로 친한국적인 맛에 먹을만했다.

 

어두워지자 3층 침대에 올랐다.

바로 누우니 병원 씨티 촬영하듯 천정이 코앞이다.

생각보다  흔들림이 적었고 소음도 없었다. 

신기하리 만치  잠이 잘 왔고 그만큼 시간이 잘 갔다.

 

난주역 앞 광장

 

 

여기가 어딘지를 나는 모른다.

내 옆에 같이 있는 사람들도 기실 나는 잘 모른다.

내가 여기 왜 와 있는지도 어렴풋이다.

나 외에 모든 사람들이, 모든 풍경들이 생경한 난주

얼떨결에 생각없이 질러댄 9박10일 중국의 여행은 이미 D-2가 진행되고 있었다.

 

떨어지면 큰일 날세라!

엄마 손 꼭잡고 가는 저 아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처지로 중국통 일행에 바짝 붙어 우릴 데릴러 온다는 기사를 기다리는

여긴 중국 - 난주의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