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면서 부르는 노래

부치지 못한 편지 - 그 여름의 봉하

조강옹 2019. 12. 24. 07:43

봉하


세상사 잠시 손 떼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는 길

팔월도 하순으로 접어드는 지난 월요일 뒤늦게 여름휴가를 떠났어.

더위 피해가는것이 여름휴가인데 늦더위가 따라왔으니 본의 아니게 구색이 맞춰진게지.


상냥한 목소리로 길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 믿고 따라간 길은 청원에서 보은,상주를 거쳐 김천 찍고 다시 내륙고속도로를 한참이나 달려 진영 나들목을 빠져나왔어.

“노무현 전대통령 생가”라 씌어진 이정표도 더러 눈에 띄긴 했지만 좁고 다소 복잡한 길 네비가 꼼꼼히 일러주는 대로 따른덕에 어렵지않게 봉하마을에 도착했어.


차를 세운곳이 마을회관 앞 공터인데 주차장으로 변했더군.

“그날” 이후 티뷔에서 숱하게 비춰주던곳이라 낯이 익긴한데 퍼즐 맞추듯 다소 조합이 필요했어.


한켠에 마련된 안내소 찾아 방명록에 서명하고 경상도 말로 한 줄 기려야 하는데 선뜻 떠오르질 않더군요.

잠시 두리번 거리는데 자전거 뒤에 손녀태운 사진과 유언을 함께 적은 대형 걸개그림이 눈에 들어오더는거야.


“남겨 놓고 가신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편히 쉬소서!”

 


그러고 보니 사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생전,  손녀를 위해 수건을 말아 아이스크림 깨 주시던 그리고 “홀” 의자에 앉아 담배피던 마을 슈퍼는 그날 이후 생겨난 고객의 욕구에 맞춰 분식집으로 변했고 마을회관 옆 자그마한 전시관은 “놈현스럽게” 치장을 해놨더군.

 


손녀 뒤에 태우고 다녔을 푸른 들녘사이 선명하게 들어나는 농로길

내 사는 옥산장터에서 오창쪽으로 가는 중간에 “고라리”라 부르는 내 친구가 살던 동네와 어찌 그리 닮았던지 이런 면에서 “노짱”은 확실한 “촌놈”이었던 게야.


“관”에서 돈 좀 들여 치장도 했을 법 한데 외려 그냥 손 놓은 덕에 적당히 어수선하고 적당히 “시골스런” 마을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오더구만.


사저 앞엔 초가집을 복원하는 공사로 어수선했고 그덕에 방문객을 맞아 한 말씀 하시던 집앞까지는 접근할수가 없어


그냥 지나쳐 가다보면 바로 나타나는 무덤

울타리는 고사하고 나무 한그루 없이 급히 닦아놓은 마당 한가운데 덩그라니 노짱이 거기 잠들어 계신데 그곳으로 가는 디딤돌 하나 하나 발 얹어 걷다보면 새겨놓은 다짐들이 있었어.

두번 절하고 남들 하는대로 발 한짝 들여놓고 돌에 손을 얹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어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원래부터 그런지 시골에 와서 그렇게 변했는지 얼굴이 까만 젊은 경비원이 거기 있더군

 

 

 


끌려가듯 사저와 무덤사이 날 길을 따라 오르는 야트막한 산, 커다란 바위

땀흘릴 사이없이 그 퍼즐의 조합이 끝나는 지점에 섰어


아까 “높이”때문에 보지 못했던 사저와 무덤, 앞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어

“강자앞에 알아서 기던 칼자루가” 이미 약자가 되어버린 가족 친지들 줄줄이 불러들이던 그 막바지 기자들이 망원렌즈 촛점 마춰놓고  “죽치고 앉아” 있었던  이 자리


남녀노소 줄줄이 올라와 “그 자리”에 서서 어떤이는 목을 길게 빼고 내려다 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기도 해

 

파아란 들판 그가 마지막 선택 이전에 바라봤을 풍경 내려다 보면서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면서 드는 한가지 의문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고 엄청나게 많은 기자들이 머물렀으면서 왜 아방궁이 아니라고 그 말 한 마디 하는사람이 없었을까?

 


줄여서 정리를 할까해

포괄적 뇌물죄란것이 원래 성립이 되는지 여부는 차제하고서라도

정권말기 너도 나도 노무현 욕하기가 국민운동화되던 즈음에 그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뇌물을 건넸을까?


생전 멀리서나마 한번 뵙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정황이란것이 있지

가만 들여다 보니 대통령가의 살림살이가 생각같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더라는 박연차의 말과 가까이는 아니지만 이십여년 알고 지내는 사이


“집”에서 가장 임의로웠을 “집사”한테 부탁을 했던게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시골 아낙들이 목소리 낮춰 조심스레 건네는 말중에 “우리집 냥반이 아시문 난리나유”


김경재라는 전 국회의원도 그리 했을거라 확인해줬고 장시간 수사했을 이 나라 검사들이 이를 몰랐을까?


알면서두 궁지로  몬 이나라 검찰, 정권

평소 그의 성격으로 그리하고도 남을 정도의 결벽증이 있다는걸 익히 알면서도 그리했다면 이른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서거하신 김대중 전대통령님의 일기

2009년 5월 23일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7월의 들녘이나 8월의 들녘이나 푸르름만 가지고는 같은 그림이지

그러나 우리같이 논두렁 출신들은 알아

8월

벼줄기 속에 하나 둘셋  일백 육십개 많게는 이백개 가까이 줄기속에 점찍듯 낱알 생겨나오는  시기

그러기에 바람이 불어 파도처럼 일렁이는 저 출렁임도 사뭇 다르지


대통령을 배출했기에 영광을 나누어 가지던 마을 사람들

그 불행도 고스란히 나누어 가졌을 마을 사람들

모두 들로 나갔는지 한사람도 보질 못했네


시골에서의 이웃은 말 그대로 멀리있는 사촌보다 나은데

그들 모두 어디로 갔는지

손님들만 북새통이룬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빠져나왔어

네비가 가리키는 부산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까웠어


부산상고 합격증 받아들고 청운의 뜻을 품고 향했을 대처

우리가 청주를, 대전을 대처로 삼듯 부산으로 향했어

이것이 이별이지 봉하와의 이별이고 노짱과의 이별이고

사는것 고만고만한 처가 자매들이 모여사는곳이기도 하기에

우리도 부산으로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