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와서 부르는 노래

영주기행

조강옹 2019. 12. 24. 06:49

예순 두 살 되시던 해 식도암 수술을 받으시고 나서 칠십까지만 살면 소원이 없겠다시던 안동아버지(장인어른)의 칠십 일곱 번째 생신을 평수 넓혀 이사 간 큰 처남네 집들이를 겸해서 영주에서 하기로 다섯 남매가 작정을 하였다.


영주는 서른 두 해전  발령장 받아들고 처음 찾아가 한참 눌러앉아 살았던 도시.

예천 거쳐 올라오면서  점차로 낯이 익어가는 산천이 반갑다.

이정표인 양, 옛 모습 변치 않고 누워있는 철길을 이정표 삼아 눈앞의 풍경에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그린 그림을 덮어씌워 보건만 겹쳐진 그림은 번번이 서로 다른 그림이다.


대쉬보드 위에 올라앉아 상냥한 목소리로 지도 짚어가면서 안내해준 얼굴없는 아가씨 덕에 쉽게 찾은 목적지.

각지에서 올라오고 내려오건만 초대받은 사람들 용케도 때맞춰 한자리에 모였다.

이내 저녁상이 나오면서 소주병 움켜쥐고 돗수 낮춘 덕에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푸념하면서 권커니 자커니 소주잔 어지러이 상위로 날아다닌다.

때론 아버지 건강을 핑계 삼고 때론 모두의 행복을 위한답시고 밤 늦게까지 퍼 마시며 우의를 다진 덕에 늦은 아침에 이른 점심까지 배부르게 얻어먹고 느지감치 길을 나섰다.


눈시울 적셔가면서 다시 만나자 굳은 맹세의 끝은 왔던 길 따라 돌아가는 길이다.

시내 벗어나 다리 건너다 문득 핸들을 우측으로 꺾었다.


왜 진작 생각을 못했을까? 

쯧쯧, 혀를 차며 둑방길 따라 올라가는 길은 내 스무 살 시절,  밤늦도록 친구들과 술 마시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목청껏 부르며 비틀걸음으로 걸어 올라오던 그 어둡고 울퉁불퉁한 길이 아니었다.


아스팔트로 매끈하게 포장해 놓은 그 둑방길 따라 올라오며 왼켠 내 살던 집을 찾아 두리번거리건만 뒤 쫒아 오는 차가 있어 밀려가다시피 가다가 보니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저 만치 이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시내로 밤 나들이 가는 길, 냇물 건너 질러갈 적 길목에 있던 “언덕위에 하얀 집”으로 명명했던 그 이층집이  고스란히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 

가까스로 유턴해 내려오는 길이 둑방 밑으로 나 있었다.

다행이다 여기면서 살펴 내려오다 이쯤이다 싶은 곳에 차를 세웠다.


“여기가 맞는데…….”

성급하게 그린 그림 하나 눈앞에 대고 맞춰보는데 영 맞지가 않는것이다.


둑방에서 비스듬하게 내리막으로 파여진 길 따라 내려오면 텃밭 하나 이어지고 가로질러 바로 빨간 기와집이 하나 있었다.

파란 대문 밀고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 부엌을 통해 들어가는 내 스무 살을 꺾어세던 자취방이 하나 여기에 있었다.

마른오징어 찢어가며 소주 마시고 누워 바라보면  파리똥 무수히 별 처럼 천장에 박혀있던 집

고향에서 대학 간 친구 편지 받고 줄창 피워대는 담배연기로 형광등 불빛이 뿌옇게 보이던 그 집이 여기에 있었다.


아내는  뭔일인가싶다가 차안에 마냥 앉아있고 나는 서른 두 해전 기억을 약도처럼 움켜쥐고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맞춰 보지만 집이 맞다 싶으면 길이 틀리고 길이 맞다 싶으면 집이 다르다

아무리 둘러봐도 콩쥐 발에 구두처럼 딱 들어 맞는 집이 없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금 기억을 되새겨  정전된 방안에서 성냥 찾듯 더듬더듬 더듬어  내려오다가 “여기다” 하고 콕 찍은 곳,  여기에도 그 집이 없다.


쌀에서 뇌 골라내듯 새로이 들어선 슬러브집이며 저 낯선 가든하며 하나씩 제켜놓고 보니 숨은 그림 눈에 들어오듯 서른 두 해전 동네가 비로소 눈에 보인다.


아뿔사.......


둑방에서도 내려다 뵈던 안마당 자리엔  검푸른 고춧대 고랑 따라  줄지어 서 있고

내 스무 살을 뒹굴리던 자취방 그 자리엔 북 잔뜩 돋워진 고랑들이 고구마 품고 누워 파란  잎새만 바람 따라 흔들어 대고 있다.

 

“어이 총각뇨, 어제도 찐하게 한 잔 했나보데요

장에 갔다 오다보이 둑방에 누워 자고있드만“

...........


‘내도 봤다.  얼굴에 파리 까맣게 붙이고 안있나 코 까쟁 골고 시상 몰고 자드라“

.................


짓궂고 정 많던 아지메들  간곳없고


“고마 가입시더”

이 세월 모르고 살아 온 아내가 어서가자며 재촉한다.

 

조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