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에서 부르는 노래

"모가지"가 늙어 슬픈 누나들이여!

조강옹 2019. 12. 26. 14:06

티뷔를 본다.

퇴근해서 저녁식사를 끝내고 나면 으레껏 정해진 자리에 앉아 가족끼리 야구경기를 시청하는 것도 큰 즐거움중의 하나였고 이른 새벽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말끔하게 차려입고 단정한 자세로 또박 또박 나라 안팎의 새 소식을 전해주는 남녀불문 앵커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티뷔를 보면서 일찍이 조선시대 왕도 누리지 못했던 호사를 이 나라 백성 누구나 공평히 누리는 것 중의 하나가 티비 시청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누구에게나 주어진 축복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다.

 

야구시즌도 아니고 안해와 함께하는 야간산책도 혹독한 추위와 적당히 타협하여 거실에 눌러앉아 뭉그적거리다 보니 자연스레 드라마라고 부르는 연속극을 본다. 우선은 방송사별로, 시간대 별로 그 다양함에 놀라고 한편으로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이 앞이 훤히 내다보이는 뻔 한 스토리의 전개로 며칠 못 보았다고 해서 연속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다가 누구나 그러하듯 겹치고 겹치는 우연에다 이건 아니다싶을 정도의 막장 이야기가 줄을 잇는 터라 덩달아 나도 욕하면서 본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새롭게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모녀지간이 자매지간 같아 보이는 현상- 늙어야 할 어머니가 늙지 않은 고로 배역은 어머니와 딸로 각각의 역을 맡아 연기를 해대는데 어색하기 그지없는데다가 늙지 않은 어머니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한 구석이 적잖게 눈에 띈 것이다.

 

그렇다!

사춘기적 친구들이 몰래 구해온 선데이 서울을 비롯한 몇몇 주간지에 수영복 차림으로 표지를 장식했던 그래서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콩닥 이게 했던 그 누나들이 아직도 늙지 않고 저렇게 시퍼렇게 젊은 모습으로 티뷔에 얼굴을 내미시는 것이다.

늙지는 않았으나 연세가 있으신 고로 어머니 역을 맡아 연기를 하는데 그 자연스럽지 못한 얼굴이며 표정은 다름 아닌 성형외과 의사선생님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늙음은 면했으나 칼을 대지 못하는 모가지는 세월만큼 정직하게 늙은 데다가 요즘 티뷔가 좀 고성능이고 좀 고화질인가?

 

환한 조명 밑에서 애써 연기하는 그 사춘기적 누나들의 이목구비 고스란히 브라운관에 비춰주니 아둔한 오십 중늙은이 눈에도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부자연스러운 즉 얼굴은 팽팽하고 콧대도 높고 흰 머리카락은 염색으로 감추었으되 추운 겨울날 목도리 칭칭 두르고 한데로 나온 역이 아닌바 에야 손도 못 대고 칼도 못댄 그래서 정직하게 늙은 모가지때문에 참 슬픈 여자탈렌트 누나들을 보노라면 저 노천명의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라는 시 제목이 생각나는 것이다.

 

짐승까지야 가겠나만 모가지주름이 깊어 슬픈 누나들의 불편한 얼굴을 보노라면 한여름 선친께서 손에 쥐고 흔드시던 부채에 까지 등장했던 그 누나들의 얼굴에 주름이 있다하여 어설픈 칼질로 부자연스러움을 더할 것이 아니라 세월 따라 정직하게 늙어가는 것이 부자연스런 젊음보다 훨씬 고색창연하지 않겠는가?

 

모가지가 늙어 슬픈 누나들이여!

조물주께옵서 그대들을 세상에 내실 적 세월 따라 늙어지게 만든 것은 사시사철 시시만큼 늘 아름다운 저 금강산 일만 일천봉처럼 젊으면 젊은대로 늙으면 늙은대로 그대들이 지닌 아름다움은 늘 한결같게 하였기 때문이라 믿으면 아니 되겠는가?

 

어찌 세상을 가면 쓰고 살 듯 얼굴에 새겨진 주름 감춰가며 살 무엇이 있다고 오늘도 깊어지는 모가지 주름 애써 외면하면서 거울 앞에서 부지런히 뺨때기 두드려가며 화장질인가? 아니, 변장질인가 이 말씀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