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공항에 도착해서 부터 연길을 떠나는 그날까지 "어머니의 마음"으로 우리를 "보살펴" 주었던 우리의 가이드 입니다.
인물이 고운 만큼 마음씨도 곱고 이른바 "옵션" 문제 가지고 적잖이 불편한 사이로 쉽게 바뀔수 있음에도 항상 진정어린 안내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었던 "김따꺼"
다들 아시겠지만 "따꺼"란 말은 형님이나 동문 수학한 사이에 사형으로 불리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를 피곤하게 했던 "인파"의 쓰나미 보다 두어 등급 높은 쓰나미가 예상되는 고로 고심끝에 우리의 지도자는 아침식사 다섯시 반 출발 여섯시로 결정되었고 열 세명의 "제자"들은 그 지시를 참 잘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모습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2016년 8월 7일 07:01분
북경에서 뱅기타고 꼭두 새벽부터 줄서 있던 인민들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의 목소리는 귀가 따가울 정도입니다.
"참 대단하다."
탄식삼아 한 마디 했는데 옆에있던 일행 자매분중 동생이 조용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얼굴 찡그리는걸 본적이 없어요!"
.............
그렇습니다.
그랬습니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수틀리다 싶으면 참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크게 떠드는듯 보였습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도 모르겠고요
분명한것은 자매 동생분 말이 맞다는 사실입니다.
목에 걸리면 그때 그때 때와 장소에 연연하지 않고 즉시 즉시 뱉어 버리는 고로 속에 남아 걸리는 스트레스가 있을리가 없겠지요
우리처럼 남을 배려하고 때로는 점잖은척 말을말다 보니 속에 담아두어야 하고 그러자니 양미간을 찌푸려햐 하는것 아닌가?
그 깨달음 이후로 중국인민들의 고성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것이었습니다.
김따꺼는 우리에게
대오를 흐트리지마라!
새치기하더라도 중국인민에게 밀리지 마라!
두 가지 당부를 해 놓고 앞에서 얻은 정보를 수시로 어미제비 새끼들에게 먹이 물어다 주듯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6.25때 난리는 난리가 아니요
지금 앞에서는 폭력사태가 발생해서 공안이 출동했다"
"가에로 붙어라"
이런 일사분란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줄은 좀 처럼 줄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8시 45분
1시간 45분 만에 가까스로 셔틀버스에 오를수 있었습니다.
같은 날 오전 9:30분
셔틀 버스에 내려 다시금 짚차로 갈아타야 하기에 또다시 서야 했던 줄
저런 차들이 수시로 사람을 태워 오르고 내려오면 꾸역 꾸역 뱉어내듯 사람들을 토해냅니다.
이미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어쩌면 천지를 볼수 없을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은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가
이를 입증하는듯 했습니다.
2016년 8월 7일 오전 10시 23분
백두산 북파 종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김따거는 매점이 있는 휴게실로 들어가라 했습니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
적잖은 공간의 휴게소는 송곳 꽂을 자리 하나 없이 사람을로 꽉 찼습니다.
시간에 희망을 걸고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날씨인고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꽃힌 송곳처럼 한참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어디선가 경상도 억양의 거친 남정네가 울부짓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신 산악회 나오소. 가보입시더. 이렇게 가다 비 그치면 대박 아니겠능교!"
비집고 몇몇 수를 헤아릴수 없는 무리들이 매점을 빠져 나갔습니다만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오히려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바람은 더 세차지고 구름은 더 자욱해졌습니다.
우리의 김따꺼는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오던 길 고대로 가파른 내리막길 곡예하듯 자동차 타고 내려와 다시 셔틀버스 타고 오분여
중국에선 장백폭포라하고 북한에서 비룡폭포라 한다했습니다.
12시 정각
30분 주어진 시간에 비를 맞으며 안해와 같이 비룡폭포로 향했습니다.
신발속으로 양말 젖는 촉감을 느끼면서 올랐습니다.
오후 세시에 늦은 점심을 먹고 연길로 향해 갑니다.
가는 길 따라 끊임없이 늘어선 옥수수 밭
그리고 간간히 눈에 띄는 빈집들
우리 어렸을적 동네와 흡사한 집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조선족임을 증명하듯 집집마다 굴뚝이 보이고 가끔씩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도 있습니다.
왔던길 고대로 가는 고로 세 시간 넘게 가는 길
김딲꺼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적
나라잃고 혹독한 추위와 가난을 견디지 못해 강건편엔 좀 낫지않겠나싶어 강건너 이주했던 사람들에겐 두고 온 땅보다 더 춥고 더 없이 살아야했다했습니다.
이들에게 북한은 아버지 같은 나라라 했답니다.
생선이 귀했던 고로 두고 온 땅으로 다시 건너가 명태잡이 배를 타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했고 귀한 생선 들고와 팔아 연명해서 견디던 차에 88올림픽과 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고 친인척들과 연락이 닿은 일부 이웃들은 남쪽 친적들이 건네준 돈 백만원이 한달 월급 오천원에 불과하던 그들에겐 재벌도 부럽잖은 호사를 누릴수 있는 큰 돈이었다했습니다.
창밖으론 노을이 물들어가는 시간
김따꺼의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알음 알음 한국으로 들어가 취업을 하고 거기서 번 돈 가지고 돌아 온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으니 자연 남한은 그들로 하여금 대대로 내려오는 가난을 벗게한 어머니와 같은 나라라 했습니다.
겨울 혹독한 추위에도 갈탄을 때서 난방을 하던 그들이 방문한 한국은 별천지- 천당과 다를바 없다했습니다.
그래서 중국내에서 소수 민족중에 가장 잘 사는 자랑스런 연변 자치주가 되었다.........
새로이 정해진 숙소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
창밖으로 연변역이 보였습니다.
앞의 낙은 건물 옥상의 지저분함이 역 광장을 가려버렸습니다.
8월 8일 아침
도문으로 간다했습니다.
또다시 이어지는 옥수수밭
어쩌다 보이는 집들은 대부분 폐가가 되었고
저 너른 들판 누가 갈고 누가 가꾸고 누가 거둘까?
내내 풀리지 않은 의문이었습니다.
가끔씩 강가에 앉아 물고기를 상대로 사기치는 꾼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한글 밑에 한자
건물 벽면의 그림조차 반가운 우리 민족의 증거, 증표
두만강 강변공원
뜀박질 하는 군인들의 모습도 보이고
누구넨가 시집장가가는 날인가 봅니다.
우리 말고는 관광객 처럼 보이는 무리라곤 서양 사람 몇몇 뿐인듯 하고
저기 두만강
저 건너편이 북한이라 했습니다.
인적 끊인 민가인지 군 초소인지 건물이 보이고 문득 가슴 저 밑에서 뭉클 솟는 그리움이랄지 서름이랄지.....
문득 어린 시절 누나들이 고무줄 놀이 하면 부르던 노래가 거짓마라 같이 떠 오릅니다.
저산 저멀리 저언덕엔
무슨 꽃들이 피여 있을까
밤이 되고 새가 울면은
꽃들은 외로워 울지 않을까
에야호 에야호
에야호 에야호
나비 와 같이 훨훨 날아서
나는 가고파 에-이-야호
또 하나
저산 저멀리 저언덕엔
무슨 꽃들이 피여 있을까
밤이 되고 새가 울면은
꽃들은 외로워 울지 않을까
에야호 에야호
에야호 에야호
나비 와 같이 훨훨 날아서
나는 가고파 에-이-야호
우리 어린 날 고무줄 놀이하던
노래 생각 나내
오래 도록 잊지 않았지
2016년 8월 8일 저녁 7:30분
우리 내외는 무사히 청주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가 내린 이후 초가을 날씨 같았던 연길과는 달리 우리 사는 곳은 아직도 여름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끝까지 정성을 다해 우리를 보살펴준 김따거 에게 진심 고마움을 다시 전하고 싶고
나흘간 일정을 같이했던 일행들에게도 고맙다 말 전해주고 싶습니다.
고추장 챙겨 끝까지 함께해준 안해에게도 클로우징 멘트 한 마디 전합니다.
"그대 없이 내 어찌 이 힘들고 먼 여행을 할수 있겠나?"
2016년 8월 10일 오후
15층 아파트먼트에서 웃통벗고 자판 두둘긴 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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