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와서 부르는 노래

백두산 여행기 1

조강옹 2019. 12. 26. 15:01


2016년 8월 5일 오후 두 시 반쯤일것이다.

일찌기 유례없이 삶아대는 찜통더위와 근 사십여년 직장에 몸 담고 있다보니 저만치서 다가오는 정년이란 이정표가 점차 다가오는 이 즈음   난 대한민국을 탈출하는 심정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높은데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늘 아름답다.

지난 휴일날 저녁 

아내와 함께 피서삼아 들렀던 대형마트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여행사에 시선이 머물렀다.

청주에서 직항으로    백두산행 패키지를 홍보하는 입간판엣 시선이 꽂혀 홀린듯이 다가갔다.

준비하듯 미리 신청한 휴가와 날짜가 거의 일치하는데다 청주직항,  아주 저렴한 가격

다만 시일이 임박하여 가능 여부는 이튿날 아침 문자로 보내줄터이니 전화번호 하나 남기고 가라는 것이었다. 


약속은 이루어져 이튿날 가능하다는 문자가 날아왔고 번갯불에 콩 튀기듯 여권 사본을 보내고 

정해진 날짜에 공항으로 나가 여행사 직원으로 부터 안내를 받고 비행기를 타고 두어 시간되어 날아와 앉은 곳. 

불과 며칠전까지만 하더라도 백두산은 커녕 가까운 바닷가 한번 가보려는 꿈 조차 없이  어제와 오늘이 하낳두 다를것 없이 삶아대는 찜통 더위 피해 괴산 어디쯤 계곡에 도시락 챙겨들고 온 종일 숨어지내다 시피하다 어둑해져서 돌아오자는 약속 하나가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이렇게 낯선 이국땅  같이 가는 일행이 누군지 조차 모르고 덩그라니 공항에 내리고 보니 안해도 적잖이 당황해하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위도 상으로 한참이나 올라왔으니 이곳은 혹시 초가을 쯤 되지 않겠나 하던 기대는 이렇게 시멘트 포장된 광장에 훅하니 올라와 숨 조차 쉬기 어려운 복사열기 만큼 답답하고 뜨거웠다.


같은 비행기 타고 온 사람들 중 비로수 우리 일행을 확인한 연유는 이들 열 한명의 이웃은 미리 한국에서 단체 비자로 묶여 왔고  우리 내외만 따로 단체 비자로 각기 왔기 때문이었다.

가이드 안내를 받아 버스로 향하고

손에 든 가방으로 햇볕을 가려야 할 정도로 태양은 뜨거웠다.

숙소까지 네 시간 여 걸린다면서 중간에 쉬어간다며 세워 준 휴게소

화장실은 듣던 것 이상으로 열악하였고

다만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지름길로 간다는 이 길만이 어릴적 조치원으로 향한 신작로를 연상시키는 덕에 친근감으로 다가왔다.


열 세명이 각기 의자 하나씩 차지하고 가도 여유가 있었다. 



전에 다녀갔을적과 신기할 정도로 메뉴가 비슷한 현지식의 저녁

낯익은 반찬만 골라 먹었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여쁜 가이드는 오는 내내 숙소가 좀 누추할것이라며 미안하다는 듯 이야기 하였으나  의외로 넓고 깨끗했다.   냉장고가 없는 것이 굳이 흠이라면 흠이었을 뿐....


아주 우발적으로 충동적으로 도망치듯 백두산 여행의 시작은 이러하였고 두시간여 비행끝에 연길에 도착하였고 두 길이 만나 합쳐진곳에 깨끗한 내가 흐른다는   이도백하까지 네시간 여 버스타고 와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다섯시 반에 식사를 하기 위해 네시 반에 일어났고 서둘러 향한곳은 서파

서쪽 언덕이란 뜻이라 했다.

서쪽에서 천지까지 오르기 위해 이렇게 서둘러야 했던 이유는 주말인데다가 방학이 끝날즈음이라 사람들이 많아서라고 했다.


해발 2744미터 가는 길이 오르막일것이고 차가 많이 기울지 않겠나하는 생각은 틀렸나보다 하였다.

평지에 임도처럼 나 있는 도로를 따라 한참이나 달렸다.

중간에 저런 마을이 눈에 띄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 살지 않는 폐가 처럼 보였다.

이후 여행 내내 차로 이동하는 동안 눈에 띄는 대부분의 집들은 비어있었다.

서둘러 도착하였음에도 더 부지런한 고로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장백산이 씌어 있었지만 백두산이라 읽었다.


미러리스 카메라를 안해에게 주었다.

가끔씩 괜찮은 사진 나올때 마다 큰소리 치는 재미로 두말없이 받아들었다.

일행중 젊은이 에게 카메라 건네 찍어 달라 부탁했는데 이렇게 찍었다.

백두산인데 장백산이 적은것이 마뜩찮아서 일것이 좋게 생각했다.

이러한 줄서기는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사방에서 중국 인민들은 큰소리로 떠들었고 뻔뻔스럽게 새치기 했으며 자기들끼리 소요를 일으켜 중국공안이 출동해서 진정시키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입장료 125위엔 

혹여나 해서 공항에서 십만원 환전해 갔으나  대한민국 유가 증권은 어디서고 무리없이 통용되었다.

이 즈음이 대략 오전 여덟시 반


 줄은 줄어들어 끝이 보이는 곳에 가고자 하는곳으로 갈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아버지 무등에 올라탄 저 아해는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배웠을까?

"하고픈 얘기 있으면 언제든 목에 걸어놓지 말고 시끄럽다해도 아랑곳 할것없이  뱉어내라!"

셔틀버스는 요런 규모이며 수십대가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도로가 좁아 마주오는 버스와 스쳐 지나갈때는 "어" 소리가 절로 나올정도로 아슬아슬한데

중국인민들은 놀라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운전기사에 대한 신뢰때문인지 대국에 살아오면서 갈고 닦은 대인배의 풍모에 기인한것인지 아직도 가셔지지 않은 의문이다.

비소로 오르막 같은 길이 시작되었고 저 언덕뒤에 천지 모습이 숨어있을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갈지자로 흔들리는  차안에서 몇장 건진 모습이 대략 이러하였다.

서파

저 봉우리, 저 언덕을 두고 이름했을까?

천지에 대한 기대감에 저 빛깔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뒤돌아 본 저 풍경이나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그림이 마치 한라산 오름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2016년 8월 6일 09:26분

900미터  1442계단을 올라야 한다.


 

앞을 바라보면 앞서가는 사람들의 뒷 모습 뿐이고

지나온 길 뒤돌아보면 저런 나지막한 경사에 평화로운 그림이 펼쳐진다.

장가계에서도 그랬고 황산에서도 그랬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


"바라옵나니 적당한 시기 저들의 짐을 내려주시고 우리가 누리는 평안과 안온을 저들에겐 곱절로 누리게 하여주옵소서!"



나는 제주 한라의 영실 오르막을 좋아한다.

그때도 그랬다.

오르면서 숨고를적 마다 뒤돌아 보면 펼쳐 지던 나지막히 내려가는 길 앞에펼져진 저건 그림들

자연  자꾸만 뒤돌아 볼 밖에.... 

앞서가던 안해를 돌려 세우고  기념삼아 한컷 찍었다.

둘이 나란히 포즈를 취하기엔 너무 혼잡했고  어서 빨리 올라가  천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급하기도 했다. 

왼쪽엔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는 사람들

산에서는 늘 그랬다.

먼저 올라 먼저 본 사람들의 족한 표정들 

하여, 정상까지 멀었나요?  

물을적 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저 여유...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안부성 인사가 필요없었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따금씩 계단 이맛박에 저렇게 카운터 하듯 새겨놓았다.

1442에 1035


아직은 조금 더 가야한다. 


가끔식 지체될때마다 뒤돌아보면  여기 있으니 어서 다녀오라

어머니 처럼 묵묵히 자리 지키고 있던 저 내리막  아니, 오름

오전 10시 11분

이른 새벽 짐 챙겨 나와 오른 천지엔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올라 온 중국 인민들로 채워져 있었다.

가까스로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중국인민에게 부탁해 기념으로 한컷 찍었다.

오래도록 잊지 않으리라!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2016년 오전 10시 18분

저 짙은 물빛

그 물은 담고 있는 바위의 빛깔


섬칫


뭉클

회갑을 눈앞에 둔 초로


힘들고 지친 영혼에

충전기 코드 연결된듯

햇볕은 따가웠으나 등뒤로 불어오던 바람이 어찌나 시원덚지


24mm 렌즈로 한 컷에 담겨지지 않는 천지를 좌충 우돌

셔터를 눌러대다가

이렇것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누어 찍어 귀국해서 합성하리라!

따박 따박 나누어 찍기로 했다.

투비 콘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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