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에서 부르는 노래

거기 그 길목에서.......

조강옹 2018. 5. 16. 21:34


게시자 : jhc43 작성일 : 2001/2/14 오후 4:48 조 회 : 269회 추천 : 7

거기 그 길목에서.......

 

모처럼 맞은 휴일 오후

마땅히 갈 데도 없고 보니 싸운 사람처럼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가

뒷산에나 갈까 하는 생각을 아내도 하였던 모양이다.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먼저 주섬주섬 조끼를 꺼내 입고 앞장을 선다.

 

광단말 가로질러 내안 가기전, 야트막한 고갯마루 거의 올라서서

오른쪽 고추밭 모퉁이에 숨은 듯이 나 있는 오솔길 따라 가는 길이

음봉산이라 불리는 동네 뒷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용케도 곧게 자란 조선소나무들이 비듬 털어 내듯 깔아놓은 연고등 솔잎을 밟으며

걸음을 옮길 적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뒤따르는 아내의 가쁜 숨소리 보다 크다.

바닥 쳐다보고 걷다 하늘을 보고, 또 바닥을 보고 걷기를 계속하다가

가끔씩 뒤돌아 보고 눈이라도 맞으면 씩 웃어가며 아내를 앞세우기도 한다.

 

바닥이 푹신해지면서 서걱 서걱으로 소리가 바뀌고 둘러보면 아듬드리 참나무가 하늘을 가리키는 곳, 정상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형성된 참나무 숲이다.

만만치 않은 곡한 오르막, 등허리가 뜨듯해지도록 땀흘려 간신히 올라선 오르막 코빼기

어인 일로 하늘이 환해지고 팔뚝만한 아카시아 나무들 고슴도치 등짝에처럼 박혀있다.

잠시 숨고르며 편편한 그 길을 천천히 걷다가 그 자리가 아닌 듯 놓여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부스스스....

계곡을 타고 몰래 비집고 올라오던 바람이

참나무 잎새에 들켜 성긴 아카시아 훌치며 성급히 달아나고

덩달아 놀란 산비둘기 푸드득 자리 뜨는 바람에 정작으로 놀란 삭정이 도막 하나, '투득' 하고 떨어진다.

 

지난여름 잎새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웃말, 아랫말, 광단말, 저 멀리 미호천 가로질러 시내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도망갔던 바람이 되돌아오는 양 개 짖는 소리가 바람 타고 올라온다.

발그레진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 삼년 젊어 보인다고 농을 걸어본다.

배시시 웃다가 엉덩이 털며 일어나는 것은 등허리가 시려워 오기 때문 일 것이다.

 

길게 숨 한번씩 들이쉬고 반대편 능선 따라 내려오기를 한참

길 옆 소나무 네 그루 동그라니 서있고 앞이 트인 등성, 선친께서 거기 잠들어 계신다.

 

 

영주 신혼시절

새애기 한번 보구싶다시며 엄니와 같이 댕기러 오셨다가

열네평 부엌겸 거실 그 점심상에서 아버지는 반공기도 채 드시지 못하고 노루모를 찾으셨고

혹시나 해서 병원으로 모시고 갔을 때 병마는 오래전 부터 당신도 모르는 사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듯 의사는 고개를 돌렸다.

 

맏이 들쳐없고 황황히 이삿짐 꾸려 고향으로 오던 그해

여름 매미가 유난히도 울어 제치고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까지 채 석달을 채우지 못하시고 당신이 모셨던 당신의 아버지, 할아버지 산소 옆에 터를 잡으신 것이다.

 

그날 이후 사랑방에 모셨던 지청, 가을비 내리는 밤이나 어두운 겨울 아침이나

아내는 기특하게도 한번도 거르지 않고 석달 열흘 조석으로 상식을 올려 드렸다.

 

서캐 잡아 드리듯 봉분에 달라붙은 떼풀 댓 포기씩 뽑아내면서

산이 좋아서 눌러 계신 것이 아닐진대 사람 사는 세상 얼마나 그리우실까?

여름이야 기다리지 않아도 오겠지만 더러는 낮에라도 한번씩 다녀가야겠다.

다짐을 표석 앞에 남겨놓고 '가자' 소리는 언제나 내가 먼저한다.

삼선골을 겨누고 내려오다가 계곡 도랑에 졸랑졸랑 봄물 내리는 소리에

홀낏 오던 길 뒤돌아 보면서

살아 계실 적 성묘 마치고 돌아오던 이 길목에서 자꾸 되돌아 보시던 아버지

할아버지 산소가 모습을 감추기 시작하는 곳, 나는 비로소 그 마음을 헤아릴 듯 하다.

추가의견 올리신분 : song47s [2001214] [수정] [삭제]

효자고 맘이 참 따뜻한 분 같읍니다. 부인과 함께 겨울 산행에 묘미도 느끼고 부모님 산소도 들리시고 ... 부럽읍니다. .

추가의견 올리신분 : 百 日 紅 [2001214] [수정] [삭제]

님의 마음이 아주 선하게 비춰주는 글 이군요.전 컴 앞에 앉아 산행을 즐겼습니다.행복이라는게 그런거지요? 이번 주말에 저도 한번 산행 해 볼랍니다.그런데 우리 마눌님은 산행을 싫어하니.....잘 읽었습니다.

추가의견 올리신분 : 파란바다 [2001214] [수정] [삭제]

잘 보았습니다. 부부가 같이 산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나누며 사랑도 깊어가는 것 같아요. 잘 보았습니다.

추가의견 올리신분 : jslee [2001214] [수정] [삭제]

jslee가 울고 싶어지는 까닭은?.......

추가의견 올리신분 : cookie [2001214] [수정] [삭제]

말하지 않아도 느낄수있는 부부..........가슴 따뜻함이 전해지네요 잔잔한 하루................

추가의견 올리신분 : ddolmi [2001214] [수정] [삭제]

오랫만에.....잘 읽고 갑니다...

추가의견 올리신분 : river113 [2001215] [수정] [삭제]

저도 잠깐이나마 산행을. . .시아버님 묘소를. . . 친정 어머니 묘소 앞을 다녀 왔습니다. 님 덕분에. . . 잘 읽었습니다.

추가의견 올리신분 : 박하사탕 [2001215] [수정] [삭제]

아버님 소천하신지 올해로 11, 묘소가 지척인데 명절 때 한 번씩 찾는 일 외에는 따로 시간을 내어 가본 기억이 없습니다. 부끄러움..... 서울 방배동 한 복판, 피튀기는 곳에 앉아 있습니다만 잠시 여유로운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듯 향기롭고 상쾌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추가의견 올리신분 : us1058 [2001215] [수정] [삭제]

글속에 찐한 부부애와 행복이 느껴지군요.......맘이 차분해 지네요... .감사!

추가의견 올리신분 : lovekara [2001215] [수정] [삭제]

. . . .잘 읽고 갑니다..

추가의견 올리신분 : chooi [2001215] [수정] [삭제]

따뜻한마음...사랑스런조강...저도 부모님 산소에 다녀와야하는데.....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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