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와서 부르는 노래

삼청산에서 노닐다

조강옹 2019. 12. 26. 14:20

 

 

2014년 6월 20일

중국에서의 두번째 날이 밝았습니다.

 

숙소에서 창문을 여니 맞은편에 자리잡은 수강병원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비는 어젯밤 늦게 부터 밤새 내리고 있었습니다.

길가 가로수 잎새에 붙은 먼지만 씻어가지 말고 "밤새  근무한 저 병원의 의사, 간호사들의 피로로 말끔히 씻어 가려무나!"  뇌이면서 창문을 닫았습니다.

 

 

어제 아침에 먹은 메뉴와 하낳두 다를것이 없는 복사판 메뉴이고 보니 골라 먹은것 또한 어제와 다름이 없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나섰습니다.

사람의 행,불행 또는 기분의 상,불쾌는 기실 마음속의 욕심을 얼마만큼 덜어내느냐에 따른다는 아주 쓸모있는 깨달음을 얻은덕에  이 비가 반갑지만은 않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언짢치도 않더라는 말씀은   여행사에 계약금을 건네고 나서야 이번 여행지역이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지고 요즘이 우기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일정 내내 비를 맞아가며 김빠진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왔던터에 어제 아주 해맑은 날씨에 벌거벗다시피한 황산을 구석 구석 손바닥 들여다 보듯할 수있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비오는 날씨도 너그럽게 대할수 있는 아량을 지니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가는 길

오른쪽이 깍아지르듯 비탈의 기울기가 가파르다 보니 낙석으로 인해 잠시 차가 멈추었습니다.

즉석에서 한중 합동 안전점검반을 구성하여 조사하고 분석하여 내린 결론은 비탈의 기울기가 가파른 것은 사실이나 퇴적되어 굳은 암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낙석의 양이 소량인데다가 비탈은 육안으로 보아도 2차 낙석의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또한 이곳을 장기간에 걸쳐 자주 왕래한 중국측의 가이드와 운전기사의 진술에 따르면 이러한 낙석사고는 가끔씩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정도가 미미하여 이로인해 여행객이나 통행하는 차량이 중대한 사고를 당한 예는 한번도 없었다하여  중국도로공사에 낙석제거를 요청하고 기다리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우리의 바람대로 잠시후 출동한 관계처의 인력으로 낙석은 제거되었으며 우리는 다시금 삼청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따금씩 눈에 띄는 중국농부들의 모내기하는 모습입니다.

날이 들면 하지 왜 하필 비오는 날 모내기를 할까 의심하다가  이곳은 하루가 멀다하고 비오는 우기이므로 이들이 비로는 날 모내기를 하는것이 아니라 모내기 하는 날 비가 오는것이라는 아주 당연하지만 늦은 깨달음을 탓하며 스스로 오른손으로 이맛박을 쳤습니다.

 

자동차로 두세 시간 거리는 그저 우리로 치면 이웃동네 마실 다니듯 하는 가이드의 거리감각이 우리를 놀래키기도 하고 한편 웃기기도 했습니다.

대화 도중에 우리가 청주에서 왔다하니 자기도 청주를 안다는 것입니다.

 

"청주 바로옆에 거기 뭐지요?  저 거기 가본적 있어요"

우리는 증평, 세종시, 조치원 등등 주변 지명을 댔으나 가이드는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다 생각난듯

 

"생각났어요!  무주...  스키도 타고  재미있게 놀다와서 알아요"

 

................

 

"그래 무주는 청주 바로 옆에있다."  

 

어제 황산으로의 이동도 그렇고 오늘 삼청산 가는 길도 포장은 참 잘돼있는것 같이 보였는데 도로에 보이지 않은 요철이 많아서 뒷편에 앉으면 말타는 것 처럼 터덜거렸습니다.

아마도 아스콘을 앏게 포장한데다가 과적차량의 과속에 의한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된 연유는 앞서 달리던 트럭의 크기도 그러하고  실린 짐의 양이나 높이가 우리 나라 도로를 달리는 트럭에 실린 그것보다 훨씬 많고 높아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얘기 나누면서 가는 길

창밖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언뜻  안동 처가 갈적 거쳐가는 증평이나 괴산의 창밖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여 문득 문득 여기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잊게 하였습니다.

 

굳이 다른것을 하나 고르라면 대나무입니다.

우연만한 야산에는 어김없이 저렇게 대나무 숲으로 덮여있었고 가까이 다가가 보면 보디빌더들의 팔뚝만큼이나 굵게 자라고있었습니다.

 

늘 내리는 비인데 왜 흘러가는 빗물은 황토빛일까?

 

이렇게 비오는 날

저 레미콘은 어느 공사장으로 가는 것일까?

여유가 있다 보니 이런 저런 생각을  땡중 염주 굴리듯 굴리면서 가는 길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안그치면 어때 어제 제대로 본 황산이 있는데......."

 

염불외듯 주문외듯 가는 길

 

아직도 이 땅에 머물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겼습니다.

 

 

드디어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우리의 여느 국립공원과 그림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높이 솟은 산 

피어나는  구름사이로 보이는 봉우리가 오히려 신비감을 더해주었습니다.

 

 

가파르다 보니 여기서도 케이블카를 타고 갑니다.

공산당 모택동의 게릴라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국민당 장계석부대가 엄청난 수의 토벌대를 동원하여 소탕하려 했음에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합니다.

그만큼 산은 높고 넓고 그 만큼 계곡은 길고 깊다는 얘기로 새겨 들었습니다.

 

오르는 동안의 날씨도 변화가 무쌍합니다.

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하는 문제는 바지 주머니에 손집어 넣고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마이클 샌댈이 설명하는  공리주의에 대한 이해 만큼이나 어렵고 헷갈리는 문제같습니다.

 

 

다만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이를테면 배터리로 가는 오토바이를 권장하고 이를 이용하는 인민들을 위해 전용 도로를 따로 건설하고 헬멧을 착용하는 번거로움을 면해주는 정책 등은 환경문제에 대한 정부관리들의 인식이 우리 정부의 관리들 보다 한 수 위에 있지않나 하는 생각과

 

이렇게 고공잔도를 건설하는데 있어 11년에 걸쳐 설계하고 18년간에 걸쳐 건설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만약 우리의 경우라면 어떠했을까?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가 되어있고 세상이 신의 정원이라면 신께서도 이곳 만큼은 특별히 아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도 들 만큼 아름다운 이곳에 고공 잔도를 설치하는 것이 자연 훼손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수 있겠지만 어제 보고 온 황산이나 이곳  삼청산과 우리의 산이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산은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아서 인간이 스스로 파고드는 것을 허하고 포근히 안아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 케이블카 설치에 대해 논란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입니다.

 

 

반면 중국의 산은 우리의 산보다 웅장하고 높고 험하고 눈부시게 아름답긴 하지만 마치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나타나 "이분이 너의 엄마시다. 앞으로 엄마로 대하고 엄마 라 불러라!"  아버지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가 안길수 없는 새어머니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하여, 비구름 속에 가려진 저 모습이나 다가가 볼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렇게 오랜세월에 걸쳐 잔도롤 건설하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을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중국인민들은 가급적 자연친화적으로 즉 신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엄청 신경써서 고공의 잔도를 건설하였다는 것입니다.

 

 

속리산의 상징처럼 불리우는 문장대 오르는 길이나 인근 속리산 자락 불가피하게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건설한 우리의 잔도는 철제 무늬강판에 쇠파이프를 난간으로 삼아 청색 페인트를 칠한것과 자꾸 비교되는 대목이기도합니다.

 

아마도 맑은 날이면 뒷 배경이 참 아름다운 곳인가 봅니다.

앞서가던 가이드가 선심쓰듯 우리 내외를 세워놓고 한컷  찍어준 곳입니다.

 

어렸을적 즐겨읽던 무협지의 내용은 하나같이 줄거리가 비슷하고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를테면 어려서 부모님이 흑도(나쁜 무리)드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가운데 용케도 살아난 어린 주인공은 천신만고 끝, 우연한 기회에 무공이 출중한 스승을 만나 비법을 전수받고 게다가 아주 운좋게 몇천년(몇백년이 결코아닙니다.)묵은 복숭아 같은 과일을 먹고 내공이 엄청나게 깊어져 천하무적의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중간에 젊고 아리따운 여인들을 이따라  만나 결국 부모의 원수를 갚고 두어서너너댓명의 안해들과 행복하게 산다는 그 숱하게 읽은 무협지에는 각종 당파들이 등장합니다.

 

거지들의 모여 결성한 개방파가 대표적이지요

이곳은 무당파가 근거한 곳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적다 보니 좀 길어졌습니다.

 

코브라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

해발 1200m 지점에 위치한 저 바위의 높이만 128m

가이드의 설명엔 아랑곳없이 구름에 가리워진 바위의 높이는 마냥 솟구쳐 오릅니다.

보이지 않는데 300m라 한들  아니라고 우길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여 이름하기를 거망출산(산에서 이무기가 나왔다)

 

앞서 말씀드린 젊어서 즐겨읽던 무협지에는 대부분 적지않게 야한 장면이 양념처럼 들어있습니다.

작가마다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여인의 요염함을 표현하기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요렇게 표현하는가 하면 "잠자리 날개같은 속옷을 입고 섰으니 ......" 요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노골적인 전자의 표현보다는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후자의 표현에 더 몸이 달아올랐던 기억이 새롭고 어제의 황산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우리 앞에 선 여인이라면 오늘의 삼청산은  잠자리 날개같은 속옷을 걸치고 서있는듯  자꾸만 애를 달궈 급기야 휴게소에서 생수를 사서 벌컥 벌컥 들이켜야 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상가에 가면 가끔씩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정확하게 옮겨적은 것은 아니지만

 

"사망의 음습한 골짜기를 지나..........."

 

저 대목에 이르러 저승으로 가는 길이 음습한 골찌기를 혼자 외롭고 무섭게 지나가야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언젠가 우리앞에 닥칠 죽음이란것 자체도 두려운데 저 건너 세상에 닿는 길 또한 만만치 않겠구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렇게 무섭고 어두운 길이 아니라 이렇게 앞이 탁 트이지는 않았지만 신비감속에 가리워져 한발 한발 조심스럽지만 희망이나 기대를 가지고 다가가는 곳이었으면 적어도 두려움만은 없지않겠나?

 

 

하여 맹인이나 유족이나 다같이 위로받을수 있는 기도문 하나 새로 적어 널리 쓰였으면 좋겠다.

그 표본으로 이렇게 구름드리워진 삼청산 고공 잔도가 적당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길을 가다 자꾸만 뒤돌아 보는 것

그리고 몇 발자욱 떼다 또다시 뒤돌아 보는 것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두고 온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가 첫째이고

다시는 못볼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깊이 새기고자

마치 화가가 눈에 보이는 사물을 정확히 옮겨 그리기 위해 자꾸만 쳐다보며 붓질하듯....

 

가면서 생각해 봅니다.

훗날 또 다시 이곳에 올 기회가 주어지고 마침 그때의 날씨는 어제의 황산처럼 햇살 맑게 비치는 날이라서 속속깊이 들여다 보거 건너다 볼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두 가지 추억중의 하나만 남기고 하나를 지워야 하는 선택을 하라면 어찌할까?

 

우리 가끔 "꿈꾸듯"이란 말을 씁니다.

꿈속에서 본듯한 이 삼청산의 저 그림들

꿈이란 깨어나면 현실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허망하고 아쉽기 그지없는 것이기에 다시금 돌아갈수 있다면 서슴치 않고 돌아가고 싶은 곳

 

 

걸음을 옮길적 마다 고개를 돌릴적 마다 저렇게 아련하게 떠오르는 저 그림들로 인하여 저는 앞서의 선택에 단연코  잠자리 속옷 걸친 삼청산을 택하겠노라 말씀 드리겠습니다.

 

왜 그랬는지 같이 걸어가면서 살펴보시지요

 

 

 

 

 

 

 

 

 

 

본디 있던 곳으로 다시금 돌아왔습니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오는것이 어찌 삼청산 산행 뿐이겠습니까만

한 줌 아쉬움이야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만족하고 보람 챙길수 있었던 것은 재차 말씀드렸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우리 앞에 선 황산녀"에 대한 대 만족과 "잠자리 날개 같은 속옷으로 가리워진 삼청녀"의 은은한 속살을 보았기 때문이라 스스로 자위하면서 걸음을 재촉합니다.

 

계단 밑으로 난 길은 화장님이 거하시는 곳이고요

화장님 면담하러 간 동료들 기다리는 중국인민들은 아침의 참새처럼 높은음으로 잘도 지저귑니다.

 

올적엔 한산했던 입구가

갈적에도 한산한 출구가 되었습니다.

 

다들 생각이 많아서였을까?

일행들은 싸운듯이 말이 없고  우리에겐 선택이고 처음이지만

어쩔수없이 필수이고 늘 올라야 했던 곳이기에 가이드는 잠이 들었습니다.

 

전동차라 부르는 저 소리없이 달리는 오토바이위에는 오늘 비가 내리는 고로 우산이라 이름한 저 비가리개가 내일즘 양산으로 바뀌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다는 욕심 하나 슬그머니 만지작 거리며

 

 

 

 

 

삽겹살에 가짓수 많은 반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무한리필이란 선택의 여지없는 성찬에도 우린 리필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배낭에서 소주도 꺼내지 않은채 사돈집에서 밥먹듯 아주 의젓하고 예의바르게 저녁식사를 마쳤습니다.

 

 

고향이 아산이라는 젊은 식당 주인

이곳의 삶이 아산에서의 삶과 비교해 무엇이 다르냐는 물음에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물음에 익숙한듯

여기오니 아는 사람없어 외롭긴하나 그래선지 아내에게 특별히 정이 더가고

한국에서 경제적 부는 향유했으나 누구에게 쫒기듯 살았으나

여기오니  가난하게 살긴하나 쫒기는듯한 불안감이 없어  이곳의 삶에 만족한다.

 

 

 

굳이 메모하지 않아도  과녘에 박힌 화살처럼 뇌리에 박혀드는 말

"혹여 잊을라!"

몇줄 적는 사이 중국에서의 세번째 밤이 깊어갔습니다.

 

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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