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보면서 부르는 노래

안동산 삼베적삼

조강옹 2019. 12. 23. 17:46

삼년간의 고행을 끝으로

아카시아꽃 활짝 핀 부대 진입로를 걸어 나온 길은


"욕봤다" 는 선친의 말씀과 더불어

음봉산 자락의 이백평 남짓

두어 떼기 콩밭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둑따라 호밋자루 놀리다

더러는 콩줄기도 잘라내고

이따금 호밋날에 채이는 자갈을

산아래 골짜기로 팔매질 하다가


게으른 오뉴월 해가 뉘엿 거릴 즈음

더 굽어져 보이던 선친의 등뒤로

산을 내려오기를 보름 남짓..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날아온 복직 통보서는

과거 어느 순간에 멎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건전지 갈아 낀 시계가 다시 돌아가듯

콩밭 메는 것보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그 생활로 서서히 묻혀 가고 있었지 싶다


마냥 곁에 있을 것 같던 여인이

여름 우박 내리듯 홀연히 떠나가더니


그해 시월인가 동짓달인가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딱히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도 없었고

나를 죽이고 싶다는 절망도 없었지 싶다.


사랑니 빼고서 마취 풀릴 즈음의

그 묵직한 통증 같았던가?


허했었던 모양이다....

딴엔 마음을 달래려고 그랬던지



내 따라 둑길 한참 올라간 산밑을 향하여 가다가

이따금씩 둑방 풀밭에 누어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때 시간이 매번 오후 세시 반경이었다.


뻐개질것 같은 투통을 머리에 이고

저녁 거른 아침에 쓰린 속 달랠 길은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출근하다가


역전 앞

그 슈퍼에의 베지밀 한 병이

신기하리 만치 속을 달래주었었다.


여기 저기 들어오는 줄을 놓아

등 떠밀린 선을 본 것이 열 번은 족히 되었으리라

모시고 비단이고 다 마다하고

운명처럼 '안동산 삼베적삼'을 골랐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스텐레스 요강과 가짜 보르네오 농짝

더불어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여자


녹슬지 않고 찌그러지지도 않은 요강은 그렇다 치고

뻐걱대는 가짜 농짝도

아직은 쓸만하다는 이유로 버리지 않고 산다.


파종 시기를 놓친 묵은 콩자루 인양

방 한구석 늘 차지하고 있는 존재


쳐다보면 내가 그인지 그가 나인지

이미 또 다른 '나'가 되어 버린 '안동산 삼베적삼'까지.......


조강.

 [2001년1월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