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면 약속된 그날이 저만치 다가오는 것이 보이는 이른바 말년 시절.
지금까지의 수고에 대한 예우 내지는 마지막 선물, 말년휴가--
시렁에 곶감 빼먹듯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결국은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나 보다.
얼굴이나 한번 보자..
결혼하자 소리도, 우리 앞으로 어떻게 살자, 그런 기약도 없이
그저 이틀이 머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던 사이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인연의 고리는 얽혀져 있었다.
귀대를 사나흘 앞두고
용돈도 그리 넉넉지 않은 휴가병 신분으로 남쪽 그 먼 도시 홀홀 단신 찾아갔었다.
예정대로 버스는 터미널에 정오에 도착되었고 어김없이 그녀는 누이와 같은 모습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도 오래 사귀어 왔건만 정작 얼굴 맞대고 만나는 것이 낯설고 수줍기 만한
그때의 나는 육군하사라는 신분의 촌티나는 전방 군인이었던 것이다.
어색하기 까지 한 악수를 끝내고 내 손이 미처 옆구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집에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고 같이 가자는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했었나보다.
그 씩씩한 육군하사의 군인 정신은 다 어디로 가고 덜컹 겁부터 났던가?
준비되지 않은 면접시험을 치를 생각에 딴은 자신이 없었나 보였다.
나는 안 간다 , 아니 못 간다.
시내 어디선가 점심을 먹고서도 그녀는 줄창 쫓아다니며 집에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초겨울 짧은 해는 금새 넘어가고 어둠이 그 소도시를 덮어 오면서 마땅히 갈 데도 없고 결국 항복문서들고 그녀의 집에 들어선 것은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초저녁이었다.
조그만 대문을 밀치면서 들어갔을 때
그녀를 맞아주던 그녀의 어머니
인연의 줄이 좀더 질겼으면 장모님이라 부를 그분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해 넘어 간지가 언젠데 다 큰 계집애가 이제서 들어오느냐"는 간접적으로 나를 나무라는 소리였고
그녀의 등 패기를 끝낼 즈음 "제가 붙잡았더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 드리면서도 이미 풀이 죽어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와의 늦은 저녁식사를 시작하였고 그 집 부모며 동생들 관중석에 앉아 관람하는 아주 불편한 그 식사를 끝내고...
이미 마음 떠난 면접시험관들 조금은 경우에 어긋나다 싶을 정도의 핀잔과 나무라는 질문에 뚜걱 뚜걱 답변을 끝내고 그녀의 방으로 옮겨 앉아 대기하게 되었다.
뭔가는 억울하기도 하고 무시당한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착 가라앉은 그 즈음에
해군 상사로 있다는 그녀의 형부내외가 기다리다 갔는데 가까이 사는 관계로 오고 있다는 요는 2차 면접시험을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
"저기 계신가?" 규칙적인 워카소리 다가옴을 느끼면서 나는 방에서 일어섰다.
당시 우리부대 주임상사의 그 우람한 체구를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내게 아주 아담한(?)체구에 동안인 해군상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반갑습니다. 저 해군상사 홍**입니다." 하면서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육군하사 정 **입니다." 기막힌 타이밍에 아주 자신 있게 응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체구가 아담해서 인지 어쩌면 평생동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무튼 반가웠었다.
"여기 부모님 계신데 어려울 테니 우리 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그러지요"
술이라면 그래도 누구 못잖은 자신감이 있었고 그보다는 이 거북하기 이를 데 없는 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인형같이 예쁜 그 상사의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진짜 머지 않은 그의 집에 당도하였다.
피엑스에서 나온 듯한 양주병 앞에 놓고 세상사는 얘기, 나와 그녀의 관계 등에 대하여 대화가 시작되었고 잔이 더해가면서
그 면접의 긴장감은 잊어지고, 엉뚱하게 나의 뇌리에는 육군의 명예를 걸고 이 술겨루기에서 해군을 이겨야 한다는 군인정신이 발동헀던가??
그 양주 두 병인지 세 병인지 결국 그 해군의 침몰장면을 보고 나서야 자리는 파하게 되었다.
이튿날
승자와 패자(?)의 어색한 웃음과 함께 늦은 아침을 먹고, 다시 그 거북한 장소로 가서 차를 한잔 마셨다.
슬그머니 안방으로 건너간 홍상사 한참이나 뒤에서야 나왔고 출근한다는 그의 뒤를 따라 나설 때
장인이 될 뻔한 그녀의 부친은 "내 우리 사위한테 얘기 다 들었네, 어찌됐던 남은 기간 복무나 열심히 하고 성한 몸으로 다시 만나세"
비로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안녕히 계십시오 "
터미널까지 배웅 나온다며 따라나온 그녀의 입에서는
"너는 좋겠다.. 울 아버지 허락이 떨어졌으니"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생각 없이 내 뱉는 그녀의 한마디가 그리 서운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
결국 과거 어느 순간에 그녀와의 뜻밖의 이별로 인연이 다했고 아직도 줄이 닿지 않은 채 이 475 어디선가, 혹 이 글을 읽으면서 쪽지라도 보낼까 말까 망설일지도 모를 일이나,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정작 그녀가 아니라
"반갑습니다 저 해군상사 홍**입니다." 하며 손을 내밀던 그 해군상사의 환한 웃음과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전해오던 따스했던 체온, 그 체온보다 더 따스했던 그의 목소리인 것이다.
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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