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에서 부르는 노래

여름날의 일기- 5만 8천원이거나 6만원이거나

조강옹 2019. 12. 24. 08:53

언어연수 간답시고 일찌감치 휴학계 내놓고 또 일찌감치 필리핀 서너 달 댕겨와서는 하는 일이라곤 삼복더위에 하루 종일 제방에 틀어박혀 무얼 하는지 모르는 작은아해가 밉기도 하고 한편 안쓰럽기도 해서 벽에 붙어있는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니 더우면 그거 틀고 있으라했던 것이 지난주 화요일쯤이었다.

 

"아부지 이거 더운 바람 나오는디 ……." 고개만 삐쭉 내밀구 하는 말에 "무어 그럴라구 사서 제대로 한번 틀어도 안본것인디" 하면서 이리 저리 리모트콘트롤가지구 콘트롤해도 당최 콘트롤이 안 되는 것이었다. 에어컨에 관한한 삼성하구 맞장떠서 유일하게 완승한 엘지라 들었기에 이른바 고객센터라는디를 찾아 전화를 연결하였다.

 

이차저차해서 여차저차됐으니 와서 손을 봐 달라 했더니 목소리만 들어도 아리따울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녀인이 대단히 겸손하고 예의바른 목소리로 '너무 심려치 마옵시고 한 사날 뒤에 사람을 보내드릴 터이니 그때 까지만 참으시오소서!" 하고 송구스럽기 그지없다한다.

 

약속은 지켜져 과연 사날 후에 젊은 기사가 연장통 들고 찾아와 둘러보지도 아니하고 대뜸 무릎꿇고 아뢰기를 "어르신네 에어컨께옵서 찬바람을 내지 못하는 것은 솔레노이드 전자밸브 고장에 연유한 것으로 사료되옵나이다" 한다. 내 알아듣도록 자시 일러달라하니 말인즉 거실의 입형과 아해방의 벽걸이형이 한 실외기를 사용하다 보니 필요할 때 냉매 통로를 열어주고 닫아주고 하는 개폐기 역할을 해주는 부품인데 그것이 제 기능을 못하여 이런 현상이 나는것이라한다. 그래도 뜯어서 확인을 해봐야지 보지도 않고 어찌 아누 하고 일렀더니 자신있다는듯 베란다 창을 열고 실외기 뚜껑을 열어 재끼고 회로시험기를 가지고 여기 저기 찍어보더니 틀림없다한다.

 

그래 이걸 어띠키 조치해야 하나 했더니 에어컨 보증수리기간이 2년으로 되어 있는바 애석하게도 어르신네 에어컨께옵서는 재작년 겨울에 들어온것이라 2년이 넘었으므로 일금 5만 8천원에 유상수리를 해야 한다면서 송그스럽기 그지없기는 전에 목소리 아리따운 녀인과 같은 심정이라는 것이다.

 

쯧, 아들 또래의 젊은 기사와 논쟁을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 아리따운 목소리의 젊은 녀인한테 다시 전화를 넣어 '일전 이차저차해서 방문한 기사 말이 이러쿵저러쿵하여 저러쿵 이러쿵해야한다하는데 정녕 그 말이 맞느냐?" 물으니 애석하기는 전에나 지금이나 한결같사오며 그쪽 기사도 매일반이겠지만 그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한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도무지 한 치도 물러날 기세가 아니다. 일단 끊으라 하고 다시 같은 번호로 전화를 넣으니 다른 목소리 아리따운 아낙이 받아 그간 사정을 되풀이해서 하소연하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녹음한 것처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목소리가 고운데다 하나같이 인정까지 넘쳐나서 애석하다는 말은 빠뜨리지 않고 앞뒤로 꼬박 꼬박 넣어 하는 말이 꼭 상갓집 문상 와서 외상주 위로하듯하다가 결론은 규칙에 의거 유상수리를 해야 할 줄 아뢴다는 것이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자세를 바로하고

 

"지금부터 내 이를 터이니 귀씻고 단디 들으라" 하고 목청을 가다듬고 딸년한테 훈시하듯 이르기를 이것이 기간으로 따지자면 그쪽 주장대로 두 해 여름이 지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다덜 아는바와 같이 삼복에나 더러 돌리는 계절용품인데다가 아해들이 나가있어 실제 가동한 것은 다섯 시간도 채 되지 않음은 그간 충분히 반복해서 말한바 있거니와 대저 에어컨이라 하는것이 리모트콘트롤러 가지고 콘트롤하는것이 일반적이 사용법임은 주지의 사실이라 고장난 부품이 사용자가 쉽게 뜯어보거나 사용상 부주의로 인한 고장을 야기할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은 나 보다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을터, 그대들이 유상수리의 근거로 내세우는 그 규칙이 소비자를 위한 규칙인가? 엘지만을 위한규칙인가 ? 그 규칙 제정할적 우리같은 소비자와 단 한번이라도 상의한적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대들 입맛에 맞게 그대들을 위한 규칙을 일방적으로 만들어놓고 유상을 강요하는것은 엘지다운 처사가 아니다 내 일전 그대들에게 말했듯이 아파트 층층마다 베란다에 걸린 실외기의 팔 할이 엘지이고 오늘날 이 엘지가 있기까지 혁신이란 이름아래 3%는 못줄여도 30%는 줄일수 있다는 정신 가지고 삼성을 재켰을적 우리 소비자들이 기립박수 보낸것이 어찌 엘지의 번영만을 위해서였더란 말이냐? 그 정신 하나같이 소비자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베란다에 걸린 그 팔 할이 이 할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내 일찍이 공업입국의 기치아래 칠십년대 후반부터 금세기 이르기 까지 나으 발전이 나라으 발전의 근본임을 깨닫고 일로 매진하여 왔음은 일백 오십만 충북 도민 남녀노소가 익히 아는 바이다. 기술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이라면 기술향상을 위해서 5만 8천원이 아니라 5십 8만이라도 두말 아니하고 내겠지만 엘지를 위해서라면 5만 8천원은 커녕 5천 8백 원도 못 내겠다. 내 전후를 미루어 짐작컨대 이는 제작상의 결함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되는 바 자동차의 경우와 같이 설령 소비자가 모르고 있다 할지라도 서둘러 사후수리를 해도 모자랄 판에 고장 났다 일러줬더니 고맙고 미안하단 말은 아니하고 유상수리라니 적반하장에 언어도단도 유분수다. 내 그대와 더 이상 입씨름 할 처지도 아니거니와 그대 권한과 책임 밖의 문제라면 내 이야기를 전해주고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갖고 있거나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의 연락처를 내게 일러주도록 하라.

내 마땅히 그와 따지리라!

 

그 녀인 마지못해 프리미엄파튼지 뭔지 금방 알아듣기 어려운 부서이름을 대고 그쪽 책임자로 하여금 조만간 전화 드리도록 하겠다며 울먹이는데 울먹이는 소리까지 그리 고울 수가 없더라! 짐짓 다독이면서 "조만간이라 하면 아침과 저녁사이이고 지금이 한낮이니 오늘 해질녘까지 내게 전화하도록 하겠다는 말이냐?" 물었더니 이삼 일 정도 시간이 걸린다며 또 울먹인다. 쯧 이삼 일이라 하면 날짜이니 시일이라 해야 맞고 두세 시간이면 시간이 맞는 말이다. 따라서 위 경우에는 시일이 걸린다고 해야 맞는 말이니 앞을 이와 같은 부분까지 신경 써야 할 것이라 타이르고 전화를 끊었다.

 

곁에서 뻘쭘히 서 있는 젊은 기사에게 더운날씨 헛걸음하게 해서 안됐으나 내 이 나이 되도록 이 땅에 살아오면서 내 상식에 반하는 일에 마음까지 따라 한 적이 없으니 이해하라 타이르고 주스 한 잔 대접해 보냈다.

 

이삼일 지난 어느 날 오후 사무실에 무료히 앉아있는데 문득 전화 한 통 날아온다.

"어르신 께옵서 일전 에어컨 때문에 걱정하신적 있으시지요? " 하면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또한 목소리 아리따운 여인이다.

 

"아, 그거 기술적인 문제가지고 얘기를 해야하기 때문에 남자분하고 통화를 해야할것 같은디유" 했더니 이차저차여차저차 결론인즉 자기가 책임자인데 직원들로부터 전후 내막을 들어본즉 규정에도 불구하고 무상으로 조치해 드려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기사도 그렇고 고객센터 직원들이 업무가 미숙한 관계로 그리 하지를 못해 어르신께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된데 대하여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다시는 이런 불미불경스런 불상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관계직원들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하여 재발방지에 적극 노력하겠으니 혜량해 주시기를 앙망한다며 정중에 정중을 더해 거듭 거듭 사죄드린다한다.

 

정녕 그리하겠다 하니 내 따로 이를말이 없겠다하려다가 상대가 목소리 아리따운 여인인지라 짐짓 누그러진듯한 음성으로 한마디 이르겠다 하고는 먼저 기사가 부품을 점검도 아니하고 고장부위를 쉽게 예측해냈다는 것은 그런 고장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기술부서에 이와 관련한 고장통계가 나와 있는지 다시 알아보고 그 부품에서 고장이 빈발한 것이라 확인되면 나와 같은 불편을 겪는 소비자들이 없도록 사전에 리콜을 하는 것이 소비자와 엘지를 위해 다 같이 좋을듯하니 허투루 듣지말것이며

 

만에 하나 이 촌부처럼 볼멘소리 하는 사람들만 가려서 마지못해 무상으로 조치하는 안일한 자세로 임하다가는 김연아의 춤바람과 더불어 삼성 하우젠에게 역전되기는 손바닥 뒤집기 보다 결코 어렵고 시간걸리는 일이 아닐것이라 엄포섞어 엄하게 일렀더니 여인 하는 말이 "어찌 이를 말씀이오이까? 각별히 명심하여 한 치도 어긋남 없도록 조치하겠사옵니다." 하면서도 목소리가 어찌나 곱다 못해 서럽기까지 한지 혼자 탄하여 가로되 "과연 엘지로다! 어찌 모든 여인들의 음성이 하나같이 사내 애간장을 녹이려한단 말이냐?!"

 

다시 이삼 일 뒤 전에 왔던 젊은 기사와 외모가 흡사한 또 다른 젊은 기사가 예의 그 솔레로이드전자밸브를 가져와서 교환하고 시운전하니 찬바람이 씽씽 나온다. 전에 방문했던 기사가 업무가 미숙하여 심려를 끼쳐드렸음을 재삼재사 사과드린다며 현관문을 나설 적까지 뒤를 보이지 않고 정중히 물러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작은 아해가 보고 듣는데서 이루어진 일이라 늙은 아비다윗이 엘지골리앗과 상식으로 맞서 거금 5만8천원의 지출을 막아냈다는 사실이 마냥 자랑스러워 어깨까지 들썩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두어 시간 보냈다. 오래지 않아 산업전선에 나갔다 돌아 온 안해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지고 들어오자마자 거실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으면서 "이 일을 어찌할꼬. 내 큰일을 저질렀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 하면서 탄식한다.

 

작은 아해가 놀라 냉수를 가져오고 제 어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면서 "어마마마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눈을 크게 뜨고 여쭈니 가까스로 제 정신으로 돌아온 듯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이마에 손을 얹으면서 도로 주저앉아 통곡하며 이르기를 "퇴근길 아파트먼트로 접어드는 신호등에서 정차하여 대기하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없길래 적색등에 좌회전 했더니 어디선가 시커먼 경찰이 튀어나와 신호위반을 따지면서 법칙금 고지서를 발부하려하길래 그냥 한번 봐 달라 사정도 하고 눈 감아달아 부탁도 하였으나 막무가내 기어코 스티커 발부해서 가져왔다 하면서 던지듯 내놓는데 아해가 냉큼 주워 들여다 보더니 일금 6만 원짜리란다.

 

작은 아해 탄식하여 가로되

 

"이 삼복에 아바마마께옵서는 노구를 이끌고 몇몇일 골리앗과 씨름하시어 5만 8천원 가까스로 막아냈는데 어마마마께옵서는 어찌 이리 쉽게 6만원을 내 주셨사옵니까?!...."

 

조강.